논평은 가급적 생략하고 있는 그대로 민주당의 분당과 신당 창당의 역사를 정리해봅니다.
1951년 자유당 창당
1951년 12월에 이승만이 집권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자유당을 창당한다. 자유당은 이범석이 이끌던 100만 명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중심이 됐고 단시일에 정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이승만 지시로 만든 대한청년단이 중심이고, 족청은 대한청년단에 흡수됐지만 주력은 족청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1952년 제 2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유당 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한 이범석 대신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태영을 밀어서 당선시킨다.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이유는 지지 기반이 불확실해서다. 1948년 제헌국회 선거에서 전체 의원의 42.5%인 85명이 무소속이었는데 이들 대부분 이승만에 비판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4명, 김성수와 송진우가 이끌던 한국민주당 29명(나중에 민주당 창당의 중심 세력이 된다. 김대중은 한민당 목포지구당 상무위원이었다.), 지청천이 이끌던 대동청년단 12명, 한국독립당, 조선민주당 각 1명에 기타 단체 소속이 10명이었다. 무소속 의원들은 이승만과 한민당에 비판적 입장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적극적이었다. 그 유명한 19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무소속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독립당의 김구와도 결별한 상태였고, 조봉암을 앞세워 단행했던 농지개혁을 두고 한민당과도 갈라섰다. 우군이 거의 없는 상태나 다름 없었다.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뒤 2년의 임기를 마치고 1950년 5월에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고, 이 때도 무소속이 124명으로 전체 210명 가운데 59%를 차지했다. 정당으로는 촉성 출신의 신익희와 대동청년단의 지청천이 만든 민주국민당이 27명으로 가장 많았다. 대한국민당(17명), 국민회(13명), 대한청년단(10명), 대한노동총연맹(2명), 일민구락부(1명), 대한부인회(1명) 등이 이승만 지지 세력이었다. 이승만으로서는 자기 지지 세력을 만들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2대 국회는 구성된 직후에 6.25전쟁으로 35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긴 후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에 나섰고,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시도했다.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태운 버스를 통째로 헌병대로 납치해 불법으로 체포하고 구금한 사건이 바로 ‘부산정치파동’이다. 이어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발췌개헌’을 하게 된다. 이에 김성수는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승만 입장에서 김성수는 발췌개헌에 이견을 제시한 배신자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
6.25전쟁이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되고, 1954년 5월에 제 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집권당이 있는 최초의 선거였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지지를 선언하고 공천권을 행사했다.(노무현 대통령이 문제제기를 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선거관리를 중립적으로 하면 되는 것이고, 소속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건 자유로워야 한다. 이승만 때처럼 말이다.)
이승만은 한 선거구에 자유당 소속 한 명만 출마시키고, 동시에 개헌에 동의하는 사람만 공천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개헌은 3선 제한 철폐를 말한다. 원래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이 제한을 없애버리는 개헌이었다. 그러고보면 이승만은 헌법 파괴자였다. 1대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제로 당선되었고, 2대에서는 자기를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많으니까 국민들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명분으로(요즘 이재명이 말하는 민주당의 민주주의와 똑같다)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버리더니, 이제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시도한 것이다.(이승만의 이런 행태도 이재명이 아주 빼닮았는데,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자기 멋대로 기관장을 임명하기 위해 사전에 규정을 바꾼다. 특히 시장과 도지사가 임의로 임명할 수 있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그런 뒤에 유동규 등을 임명했고, 황교익도 이런 방법으로 임명할려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포기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도 법을 만들어놓은 뒤에 자유와 인권을 침해한 사례다. 유신정권은 법대로 했다. 이재명 논리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긴급조치는 위헌 판결을 받고 무효가 됐으며, 긴급조치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총선 결과 자유당은 전체 203석 가운데 111석을(김영삼이 초선 국회의원이 됨), 윤보선과 신익희, 조병옥 등의 민주국민당이 16석, 무소속 70석, 국민회 3석, 대한국민당 2석, 제헌국회동지회 1석이었다. 자유당 의석수는 개헌 정족수인 136석에 모자랐다.
1954년 9월,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 탄생한다. 개헌 정족수는 3분의 2다. 그러면 136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헌에 찬성한 표는 135표였다. 반올림을 해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사실 반올림도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203석의 ⅔는 135.33인데 반올림이 안된다. 반올림이 될려면 135.5가 돼야 하니까…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원래대로라면 이재명의 득표율이 50%에 미달해서 결선 투표에 가야 했지만,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던 이상민이 중도 사퇴한 김두관, 정세균한테 투표한 표를 무효표 처리해서 이재명이 과반수가 되게 했던 사건도 이승만의 사사오입에 버금가는 사사오입이라고 하겠다)
자유당에 맞설 강력한 야당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1955년 9월 다양한 정당과 정파 출신의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창당한다. 민주국민당의 신익희와 윤보선, 조병옥,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김성수, 재야세력인 장면, 자유당 소속으로 사사오입 개헌 당시 반대표를 던졌던 김영삼, 김두한(우리가 아는 그 김두한 맞다), 민관식 등 12명이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민주당은 2016년에 발간한 60년사에서 민주당 창당의 큰 주축세력으로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을 꼽고 있다. 두 당은 공통적으로 ‘민주’를 당명에 넣고 있었고, 민주당으로 합쳤다.)
당시 조봉암의 합류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극우로 분류되는 조병옥, 김도연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중에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막판에는 일제시대 때 공산당 당수를 지내다 7년이나 옥고를 치른 김준연이 강력 반대하면서 조봉암 합류는 최종적으로 불발됐다. 당시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합류하려던 장택상이 조봉암애 대해 보증을 서고, 신익희가 조봉암을 옹호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서 농림부장관으로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농지개혁을 밀어부친 데 악감정을 가진 한민당 출신들의 반대도 심했다. 조봉암의 농지개혁을 공산주의 논리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민주당 지지자들은 토착왜구 타령이 얼마나 부끄러운 행위인지를 알아야 한다. 토착왜구로 따지면 민주당 주축 세력의 하나인 한민당을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봉암을 비토한 논리를 안다면 더더욱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조봉암이 결국 민주당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자유당을 탈당했던 장택상과 이범석은 이에 실망해서 민주당 합류를 포기했다. 조봉암은 윤길중과 함께 진보당 창당 준비에 나서게 된다.
사실상 첫번째 분당, 1960년 총선
1956년 5월에 치러진 3대 대통령-4대 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선거운동 중에서 서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익희는 서거하자 무려 20.5%가 무효표로 신익희 지지를 표시했다. 무효 투표수 기준으로 득표율은 이승만 55.7%, 조봉암 23.9%, 무효표 20.5%였다. 유효투표수 기준으로는 이승만 70%, 조봉암 30%였다.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해 무효표를 만들었기 때문에 무효표로 계산하는 게 맞다. 부통령으로는 민주당의 장면이 46.4%로 자유당의 이기붕(44%)을 이기고 당선됐다.
비슷한 사안으로 2021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의 무효표 처리가 있다. 이 사안은 얼핏 1956년 대선과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민주당은 김두관, 정세균에게 이미 투표한 ‘유효한 표를 무효표 처리’한 것이다. 이미 투표를 했는데 무효표로 처리하는 게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 민주당 선관위는 무효표로 처리했고, 이낙연 지지자들은 이미 투표를 했기 때문에 무효표로 처리하면 유권자들의 표심을 왜곡한다고 반발했다. 이재명의 득표율은 무효표 기준으로 49.32%, 유효표 기준으로 50.29%였다.
1956년 11월 조봉암은 1958년 총선을 목표로 진보당 창당에 나섰고,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총선을 불과 넉달 앞두고 진보당의 강령에 담긴 ‘평화통일’을 문제삼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디. 진보당은 2월에 정당 등록도 말소됐다. 5월 재판에서 검찰은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구형하고 나머지 간부들은 무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2심은 1심을 뒤엎고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1959년 2월에 사형이 집행됐다. 조봉암은 2010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52년만이었다.(이명박이 감옥가는 데 10년 밖에 안걸렸다. 이재명 감옥가는 시간은 이 보다는 더 빠를 것이다. 이재명의 온갖 추악함을 고발했던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박해했던 니들이 지금은 승리자로 보이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무한대로 남았다.)
어떻든 민주당 창당의 효과로 1958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의미있는 야당의 지위를 확보했다. 서울은 16석 가운데 15석을 석권했다. 면면이 화려하다. 윤보선, 주요한, 정일형(정대철의 아버지), 민관식, 조병옥(조순형의 아버지), 김도연, 이민우, 이철승, 유진산, 박순천 등 향후 민주당을 이끌고 갈 인물들이 대거 당선됐다.(김대중은 이 때도 강원도 인제에서 낙선했다. 영화 킹메이커에 나오는 내용임) 그리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가 구축됐다. 이어진 1960년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무리하게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총동원했고 4.19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붕괴됐다.
1960년 7월 29일에 치러진 총선은 사실상 민주당 독주 무대였다.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혁명을 초래한 정당은 문을 닫는 수준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민주당 내부의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했다. 신파와 구파 간 경쟁이었다.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각 선거구에서 사실상 민주당 후보간 경쟁이 펼쳐졌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하원) 233석 가운데 175석을, 참의원(상원)에서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자유당은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으로 몰락했다. 그 다음으로 무소속이 가장 많이 당선됐는데, 이 무소속이 바로 공천에서 탈락한 민주당 신구파 정치인들이다. 신구파는 선거운동도 따로 했다. 서로를 경쟁자로 공격했다.
이듬해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없었다면 이후에 민주당 신구파가 갈라져서 중도진보, 중도보수 양당 체제를 구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선거 전에 민주당에서는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정되어 있고, 사실상 일당 독재체제가 될 수 있으니 선거 후에 분당해서 양당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이후 나는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이와 비슷한 논리를 펼친 바 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해서 중도보수-중도진보 양당 체제를 구축해서 국민의힘을 극우로 몰아넣어 극소수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좀더 우경화되어야 하고, 국힘당에서 이탈했지만 여전히 민주당을 미심쩍어 하는 온건보수 유권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자로 유입시키는 정책 개발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극우를 제외한 보수적 유권자들을 민주당 지지층으로 담아내야 국힘당을 극우 정당으로 확실하게 만들 수 있고, 온건한 보수 유권자들을 국힘당에서 분리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하물며 정책에 따라 양당을 교차 지지하는 중도 포지션 유권자는 말해 무엇하겠나.
민주당이 1987년 이후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민주진보세력 대통합’을 외치면 외칠수록 중원도 지키기 힘들다고 피토하며 떠들었다. 이 구도야말로 소멸해야 할 국힘당에 숨구멍을 열어주는 전략이라고 말이다. 민주당이 좌측으로 갈수록 국힘당이 망하는 게 아니라 정의당이 망한다고 외쳤다. 이미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정의당은 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이 중원을 확실하게 장악한 것도 아니다. 대선 결과로는 이미 국힘당한테 넘어갔다. 2018년 이해찬 체제 이후 민주당은 중원을 차지할 생각을 버렸다.
중원을 빼앗기자 고작 내세우는 게 극우들 목소리를 반영하는 거였다. 송영길이 쏟아낸 부동산 규제 완화책을 보라. 그게 극우 정책이지 중도적인 정책인가? 조중동 목소리를 반영하는 게 중도가 아니다. 극좌에 극우 정책을 섞으면 중도가 되나? 똥물에 독극물을 타면 그게 중화인가? 마실 물이 되는가? 당장 힘들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는 지켜야 한다. 여론이 밀린다고 그냥 깃발 내다버리는건 중도가 아니라 투항이다.
삼국지식으로 바라본 현재의 민주당
김어준과 그 아류들이 맨날 한국 정치를 삼국지식으로 이야기해서 나도 삼국지식으로 국민의힘 말살 계획을 말해보겠다.(이젠 이미 물건너 간 이야기지만 나는 지난 5년 동안 떠들었던 이야기다.)
민주당이 촉, 안철수가 오, 국힘당이 위라고 해보자. 삼국지 당시 형세와는 달리 안철수는 양쪽 협공을 당해 형주와 교주를 민주당에게 빼앗기고, 양주도 북쪽은 국힘에 빼앗겨 구석 자리나 겨우 지키고 있는 신세였다가 위에 복속되었다. 물론 민주당도 안철수와 합당할려고 무진장 노력한 바 있다.
어떻든 민주당은 촛불혁명 덕분에 오나라의 형주와 교주를 차지하며, 기세를 이어 북쪽의 위를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2018년 지방선거 결과는 1960년 7월 총선 분위가와 비슷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거기서 더 이상 우측으로 나가지 않았다. 자기들은 원래 왼쪽 땅에 살고 있는 지지자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우경화해서는 안된다며 진군을 멈췄다. 아니 회군해버렸다. 이게 2018년 이해찬 체제다.
2020년 총선은 표면적으로는 압승이다. 180석 가까이 획득했으니 그런 평가가 나올만하다. 하지만 이 당시 나는 200석은 가능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처음에 이런 분석을 내놓으니까 다들 말도 안되는 망상으로 치부했다. 유시민이 설레발 치지 않고, 민주당이 좀더 겸손했으면 200석이 아니라 210석도 가능했다. 실제로 그랬다. 비록 민주당 지도부와, 이미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한 맹획(이재명) 세력이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중원땅에 살던 유권자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국힘은 기대감을 가지기 힘든 정당일 뿐이었다. 그래서 중원에 있던 유권자들도 적어도 위나라 치하에서 살기 싫다며 촉의 진군과 입성을 환영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자신들을 지지해준 중원의 유권자를 배신하고 회군해버렸다. 중원의 유권자가 등을 돌린 게 아니다. 민주당이 군대를 회군해 맹획의 본진을 지키겠다며 군대를 뒤로 물렸다. 이게 2020년 이후 벌어진 민주당의 상황이다. 그 정점은 검수완박이다. 민주당이 맹획을 소중한 자산으로 품더니, 아예 민주당이 맹획이 다스리던 남만처럼 되어버렸다. 민주당은 온화하고 품위있는 정당에서 과격해지고 야만적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동안 맹획의 남만 옆에 붙어있던 정의당은 당원들이 남만으로 넘어가면서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다. 맹획 이재명은 다양한 이민족, 한총련 출신 주사파와 경기동부, 민평련, 유시민의 국참계, 박원순계 등 다양한 유랑민들을 이끌고 촉에 의탁해 세력을 불려나갔고, 이제 촉은 맹획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고, 촉은 남만이 되었다. 그리고 중원은 잊혀지고 버려졌다. 이제 망할 날만 기다려야 할 운명이다.
중원 진출이 좌절된 후 제갈량은 이렇게 탄식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하늘이로구나!” (謀事在人 成事在天)
민주당의 운명이 어찌 촉과 다르리오.
덧 1) 한국 정치판에, 특히 민주당 정치판에 치유 불가능한 몇 가지 역병이 돌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제갈량병이다. 중국 속담에 “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삼국지’를 경계한 것은 정치를 음흉하고 교활한 계책, 위장술, 기만, 권모술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삼국지가 정치를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은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외갓집에 있던 1960년에 발간해 세로로 쓰여지고 한자가 득실거리는 5권짜리 삼국지를 7회독했다. 읽을 책도 없었고, 재미있어서 해마다 두어번씩 읽었다. 나도 정치판을 삼국지식으로 썰을 풀면 한없이 풀 수 있다. 그러나 한번도 삼국지식으로 정치를 설명하지 않는다. 삼국지식 정치 해설은 정치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덧 2) 제갈량병 비슷한 역병으로는 정도전병, 마키아벨리병, 정조병, 등소평병이 있다. 이 역병들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