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기가 찹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듣고 또 들었습니다. 수십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제 귀에는 분명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X팔려서 어떡하나"였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배 기자들은 물론 가족, 지인에까지 의견을 구했습니다. 답은 같았습니다.
전 국민은 그렇게 강제적 듣기평가로 내몰렸습니다. SNS에는 조롱이 넘쳐 납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이 같은 해명을 내놔야 했던 나름의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외교안보 정책의 1순위를 한미동맹 강화에 둔 상황에서, 유엔총회가 열리는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그것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한 회의장을 빠져나오면서 내뱉은 발언이 미국 의회와 대통령에 대한 '무시'였으니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전후 맥락은 이렇습니다.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바이든 대통령 주최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가 열렸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초청을 받아 회의에 참석했고, 1억달러의 재정 분담을 약속했습니다. 미국은 60억달러, EU는 42억달러, 독일은 20억달러, 일본은 10억8000만달러를 보태기로 했습니다. 미국도, 한국도 의회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각 국 모두 재정 상황을 감안하면 의회 설득이 필요합니다.
계획했던 한미 정상회담은 무산됐고, 윤 대통령은 회의장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48초가량의 짧은 환담을 나눴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 한미 스타트업 서밋과 K-브랜드 엑스포 등 한국 경제인 관련 행사에 불참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급작스런 방문 취소 통보에 중소기업인 등 관련 인사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짧은 순간이라도 한미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야 했습니다. 앞서 무리하게 한미 정상회담을 확정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조급한 성과주의가 빚은 참사였습니다.
48초 간 짧은 만남 이후에는 욕설과 비속어가 섞인 해당 발언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실은 보도를 막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이걸 '다행'이라고 써야 하는 제 모습이 초라합니다) 회의석상에서의 공식 발언은 아니었기에 진솔한 사과로 미국 측의 양해를 구하면 됐을 일입니다. 그러면 소란과 여진은 있겠지만 '가십'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프닝을 참사로 키운 건 대통령실의 어이없는 해명입니다.
다음은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의 해명입니다.
"다시 한 번 들어봐 주십시오. "국회에서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 얘기가 나올 리가 없고, '바이든'이라는 말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어제 대한민국은 하루아침에 70년 가까이 함께한 동맹국가를 조롱하는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순방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상대국과 총칼 없는 전쟁을 치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한 발 더 내딛기도 전에 짜집기와 왜곡으로 발목을 꺾습니다. 대통령의 외교활동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동맹을 이간하는 것이야말로 국익 자해 행위입니다."
많은 기자들이 다 들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바이든'이라는 지적에는 "충분하게 검토 작업을 거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발언 당사자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직접 확인도 거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해당 영상에 대해 '짜집기'와 '왜곡', '거짓'의 이간이라고 했습니다. 미 대통령이나 의회가 아니라 우리 국회를 향해 한 말이라고 해도 '욕설'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는 지적에는 "개인적으로 오가는 듯한 거친 표현에 대해 느끼는 국민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만 했습니다. 사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올 초 인플레이션의 심각성을 묻는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 기자에게 욕설을 했다가 사과한 일이 있습니다.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착각해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 잘못된 발언이었고, 바이든 대통령은 사과를 했습니다. 사태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진솔한 사과가 진정한 수습책임을 바이든 대통령의 설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 한국 국회에 그 어떤 협조를 요청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입니다. 미국 의회가 됐든, 한국 국회가 됐든 "이 XX들"로 집단 매도됐습니다. 이준석 대표는 이미 '이 XX, 저 XX' 대열에 합류해 있습니다.
정치부장 김기성 kisung012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