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약국 출입문에 코로나19 부착된 자가검사키트 품절 안내문. (사진=동지훈 기자)
[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대마불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인데 여러 돌이 모여있어 곤마에 처해도 여러 방면으로 활로를 모색할 수 있어 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산업계에선 대마불사에서 '크다'라는 의미가 강조돼 '큰 놈은 죽지 않는다' 쯤의 의미로 여겨집니다. 이런 경향은 영화로도 다뤄졌죠. 2011년 개봉한 '투 빅 투 페일'을 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덩치의 위력은 바이러스를 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처음 맞닥뜨리는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유행 상황에서도 큰 놈이 살아남는 대마불사의 진리는 유지되니까요.
범위를 우리나라 제약산업계로 좁혀보죠. 우리나라는 극히 적은 신약개발을 위해 제네릭 위주의 시장이 형성된 국가입니다. 전형적인 제약산업계 후발주자의 모습이죠.
길어진 코로나19 유행이 대마불사 형태를 보인 지점은 감기약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나열할게요. 먼저 인류의 반격이라 불리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곧이어 비교적 독성이 약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하면서 감기약 수요가 늘었습니다. 그런데 백신 접종 이후뿐 아니라 코로나19에 걸린 뒤 먹어야 할 감기약 공급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정부 브리핑에서 감기약이나 해열제 대신 아세트아미노펜이라는 특정 성분을 언급한 덕도 있었죠.
최근에는 특정 성분의 감기약 수요를 부채질한 요인이 더해집니다. 바로 중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 대폭 완화입니다. '제로 코로나' 정책 기조를 유지하던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치료 옵션으로 감기약 구매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중국 보따리상의 감기약 사재기 현상에 대한 경고등이 켜지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원료의약품입니다. 원료의약품은 A라는 약을 만들 때 필요한 주성분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등록된 아세트아미노펜 원료의약품 91개 가운데 73개가 중국산입니다. 전체의 80%가 넘는 비중을 중국산이 차지하는 셈이죠. 만약 중국이 자국 내 코로나19 팬데믹 안정화를 위해 아세트아미노펜 원료의약품 수출 제한 조치라도 한다면 한국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겁니다.
다행히도 중국이 아직 감기약 원료의약품 수출 제한을 추진하지 않는 모양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비는 필요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대마불사라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로 읽힙니다. 매출 규모에 따라 원료의약품 수급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갈리니까요. 종근당이 대표적입니다. 종근당은 계열사인 경보제약이 원료의약품을 취급합니다. 오유경 식약처장이 최근 종근당 천안공장을 방문한 것도 결국은 원료의약품 수급 맥락입니다. 물론 종근당이 아세트아미노펜 성분 감기약을 자체 생산하고, 연내 1억정가량을 공급할 수 있다는 명분도 큰 몫을 했겠죠.
그럼 대형 제약사가 아닌, 영세한 규모의 기업들은 어떨까요? 원래도 여유가 없었는데 코로나19로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귀해지면서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매출 규모나 사업 구조상 도저히 원료의약품 전문 계열사나 자회사를 둘 수가 없고, 자연스럽게 값싼 원료를 찾게 되겠죠.
건강을 되찾으려는 목적이든 질병을 막으려는 목적이든 약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필수적으로 채워야 하는 조건만 맞춘다는 조건하에서 그렇습니다. 감기약은 만들기 까다롭지 않은데 아직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병입니다. 더구나 인류를 강타한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큰 놈들만 살아남는 구조여선 안 됩니다. 정부가 나서든, 산업계가 손을 걷고 나서든 중소사들도 원료의약품 고민을 덜게 해야 합니다.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