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제 지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일부 국가는 중국 위안화나 인도 루피화와 같은 대체 통화를 찾고 있거나 자체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한 발언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 다툼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가운데, 당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유럽 경제계를 대표하는 라가르드 총재의 말은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나왔는데요. 실제 패권 경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중국이 일부 국가의 국제 거래 수단을 위안화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미국 제재에 위협받는 국가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요.
하지만 미국 달러가 향후 10년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훼손당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10년 뒤에도 달러가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절반을 넘게 차지할 것이라는 설문조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실제 파이낸셜타임(FT)에 따르면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OMFIF)이 전 세계 75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한 연례 설문조사에서 전체 외환보유액 중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58%에서 10년 후에도 54%로 집계되면서 현재의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OMFIF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산하의 싱크탱크인데요.
반면 달러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해 온 중국 위안화의 경우 10년 뒤 전 세계 외환보유액 비중이 6%로 달러 대비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니킬 상하니 OMFI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각국 중앙은행 운용 담당자들은 미·중 대립 등 불확실성을 이유로 아직 위안화 보유액을 늘릴 때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며 "향후 10년간의 탈 달러 움직임이 과거 10년의 추세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각국 중앙은행들의 달러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 반면 위안화에 대한 관심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번 조사에서 달러 통화 비중을 늘릴 계획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약 16%를 차지했고, 달러 비중을 줄이겠다고 답한 중앙은행은 10%에 그쳤습니다. 반면 위안화 통화 비중을 늘릴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작년 30%에서 13%로 크게 감소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9년 70%에서 지난해 말 기준 58.4%로 20여년 사이 크게 줄었습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같은 추세가 지속될 경우 향후 10년 안에 달러가 전 세계 외환보유고의 절반 이하로 내려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었는데요.
중국은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가진 나라로, 미국과의 패권 경쟁 속 무역·원자재 결제 등에서 자국 통화 비중을 늘리며 탈달러 흐름을 주도해왔습니다. 여기에 미국 기축통화 체제의 중심에 섰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친미 노선을 정리하는 행보를 보이고,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친중 국가들이 원유 거래를 달러 대신 위안으로 결제하기로 하는 등 세력을 규합하면서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을 이어갔지요.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 주도의 러시아 금융제재와 미·중 대립 강화에 따른 지정학적 문제 부상 등으로 각국 중앙은행들이 중국에 대한 투자를 꺼리면서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위상을 지키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달러의 위상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다들 알고 계시지요?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