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왕의 DNA'라는 말이 일종의 유행어가 됐습니다. 이 말은 교육부 공무원 A씨가 자신의 자녀를 부탁하며 담임교사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던 말인데요.
A씨의 자녀는 경계성 지능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적장애 아이에게 '왕의 DNA'가 있으니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 듣는다"며 교사에게 말 조심을 당부한 편지를 보낸 겁니다. 편지에는 "반장, 줄반장 등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되면 자존감이 올라가 학교 적응에 도움이 된다"고도 적혀있습니다. 이를 비롯해 A씨는 교육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이용해 해당 교사에게 갑질을 행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습니다.
교사에겐 무리한 부탁일 수밖에 없는 편지내용과 더불어, 이러한 의식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왕의 DNA'라는 말이 급속도로 주목받게 된 배경입니다. 이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만든 건 대전 지역 한 민간연구소로 추정됩니다.
해당 민간연구소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자폐스펙트럼장애 등을 약물 없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런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왕의 DNA'를 가진 아이, 또는 '극우뇌' 아이라고 칭했습니다. 행동장애 또는 지능장애를 가진 아이를 장애가 아니라 특성이 강한 아이 정도로 표현한 것이죠.
장애 아동 부모들 입장에서는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닌, 남들보다 특별한 특성을 가진 아이라는 말이 크게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위로에만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연구소의 방침은 약물의 필요성을 부정하면서 문제가 됐습니다. 실제로 행동과 지능 장애를 가졌다면 행동 교정 치료와 교육에 반드시 약물치료가 동반돼야 합니다. 발달장애 치료에서 결정적인 시기에 약물치료가 이뤄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많은 전문가가 입을 모으고 있는데요. 시기를 놓치면 증상이 더욱 악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모의 환상을 충족시킨 이 연구소의 치료 이론은 결국 여러 아동들에게 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논란을 두고 '안아키'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에 빗대 '왕아키'라고 이번 사태를 표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아키는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한 인터넷 카페를 이르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약물 도움 없이 아이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고 공유한 곳으로,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한 한의사가 '자연주의 육아'를 표방하며 2013년 설립했습니다.
안아키 회원들은 이 한의사의 지침에 따라 열이 나도 해열제를 쓰지 않고 아토피에도 연고나 보습용 로션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백신의 부작용을 강조하며 백신 접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열을 더 내 땀을 빼도록 하거나 아토피를 긁도록 두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고 자녀에게 적용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민간요법' 수준이었으나 한의사라는 전문성에 기대 마치 정식 의학 지식처럼 안아키 카페 회원들을 좀먹었습니다. 그러나 카페는 2017년 봄 6만명의 회원을 돌파하며 성장했습니다. 결국 수많은 아동들이 피해를 입었고, 뇌막염 치료 시기를 놓쳐 영구 장애가 남거나 아토피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이도 발생했습니다.
약으로 치료하기 힘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 내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희망, 나는 일반 부모와 다르다는 오만. 그러한 거짓된 믿음이 자녀를 해친 사례라는 점에서 안아키 사태와 이번 논란은 닮아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학교 내 교권 추락이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알려져 더 큰 화제가 됐습니다만, 놓쳐선 안 되는 중요한 점은 해당 자녀의 건강입니다. 이 아이가 과연 '왕자' 또는 '공주'로 취급받으며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약물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성장한다면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살아생전에는 부모가 시종 노릇을 한다지만, 부모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누가 이들의 시종 노릇을 자처할까요. 부모의 욕심으로 허황된 믿음을 선택하고, 자녀의 건강을, 심지어는 인생을 망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겠습니다.
세종정부청사 교육부 전경. (사진 =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