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성은 기자] 강원도 동해안의 한 소도시에서 80년을 살아온 최장수 씨는 올해 추석부터 차례를 지내지 말자는 가족들의 성화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집안 장손으로서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어 아내와 며느리들의 '제사 폐지' 요구를 애써 못 들은 척 해왔습니다.
칠순이 넘은 아내가 명절마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 이번 설에는 어렵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명절 차례만큼은 없애기로 말이죠.
최 씨는 무언가 모를 죄책감과 가족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몰려와 옛 학문에 정통한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심 차례를 지내지 않는 것은 얼토당토않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수화기 너머 들려온 형님의 말은 "자네,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가?"라는 되물음이었습니다. 요즘 제사 지내는 집이 어디 있느냐며 수년 전에 이미 제사를 없애기로 가족들과 합의를 봤다는 게 형님의 대답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제사는 과거 집안의 대를 잇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중요한 법도였지만, 현대 사회로 오며 불필요하고 낡은 풍습으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고부 갈등, 부부 갈등 등 가족 불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고,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탄생했을 정도입니다. 가파르게 오른 물가에 경제적으로 제사상 차리기가 힘겨워진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싸울 거면 차라리 없애자'는 인식이 확산한 데다 세대교체가 이뤄지며 최근에는 '제사 없는 집'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명절은 여행가는 날로 바뀐 지 오래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주최로 열린 추석 차례상 시연 행사 모습. (사진=뉴시스)
풍습이 시대에 맞춰 빠르게 변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사라는 문화가 건재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가족의 모습이 많이 변화했습니다.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 혹은 한 동네에 모여 살았던 옛날과 달리 핵가족화가 된 것은 물론 도시화로 사는 지역도 다양해졌습니다.
가족들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족이라는 범위가 좁아질수록 장손의 의미는 흐릿해졌고 제사는 그저 무거운 짐이 돼버렸습니다. 여성의 몫으로 인식됐던 제사상 차리기도 맞벌이 부부 증가와 여권 신장 등의 영향으로 기피 대상이 됐습니다.
이렇다 보니 국내 유교의 중앙본부 역할을 하는 성균관에서는 '현대화 제사 권고안'을 발표하고 나섰습니다. 고생해서 전을 부칠 필요가 없고, 치킨 등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려도 된다며 제사 음식 간소화를 천명했죠.
그럼에도 제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되돌리기는 이미 늦은 듯합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제사를 권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실제로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지난해 리서치뷰에 의뢰해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62.2%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사회 변화에 최씨는 마음은 언짢습니다. 어릴 때 봐왔던 사회상과는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수년 간 옛 문화와 가족들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올해는 가정의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 씨는 비록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은 차리지 못하지만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제사라는 행위의 본질은 잊지 않겠노라 되새기며 마지막 차례상 앞에서 조상님께 제사 폐지를 고했습니다.
김성은 기자 kse5865@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