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둥절했다. 갑자기 학벌 이야기는 왜 나온거지? 학벌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고, 각종 SNS나 커뮤니티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학벌 이야기가 나왔다는 거지?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하 존칭 생략) 이야기다. 문제의 발단부터 짚어보자.
엉망진창인 추도글에서 시작된 논란
논란의 시작은 지난 3월 26일 천안함 폭침 10주기를 맞아 추모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박지현이 올린 글은 팩트가 한 두 군데도 아니고 전체가 틀린 글이었다. 여러 사실을 뒤섞어 하나의 사실로 엮은 조잡한 짜깁기 수준이었다. ‘연평도’, ‘20년째’. ‘2002년’, ‘3월 26일’. ‘잠수정’이라는 키워드는 제각각의 역사적 사실 속에 존재한다. 박지현은 이걸 하나로 묶어내는 짜깁기의 초절정 신공을 선보였다. 박지현의 글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은 총 3개다.
-2002년 6월 29일 제 2차 연평해전(6명 전사, 19명 부상)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천안함 폭침(47명 전사)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2명 전사)
-박지현이 창조한 새로운 역사 : ‘2002년 3월 26일 연평도에서 북한 잠수정의 기습공격을 받아 55명의 용사가 전사한지 20년째 되는 날’
어느 정도로 엉망진창인지 감이 오는가? 이건 그냥 간단한 실수 정도가 아니다. 총체적으로 엉망이다. 천안함 폭침 10주기에 맞는 팩트는 ‘3월 26일’이라는 날짜 하나 밖에 없다. 나머지는 전부 다른 역사적 사건에서 가져온 팩트다. 심지어 55명의 용사는 3개의 사건에서 전사한 숫자를 모두 합친 숫자다. (윤석열이 부산 민주공원에서 6.10 항쟁 운운했던 사실을 들이대며 윤석열을 왜 비판하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윤석열은 그 당시에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젊은이는 실수를 할 수 있는데 왜 난리냐고?
3개의 역사적 사건을 뒤섞은 박지현의 글은 당연히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박지현 본인도 엉터리 글을 올린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 사과 역시 구질구질했다.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는 해명이었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도 직접 SNS에 글을 올리는 시대에, 20대 비대위원장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글을 올렸다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로만 듣던 ‘젊은 꼰대’ 그 자체 아닌가? 이 문제는 차라리 사소하다.
문제는 나이 좀 먹었다는 어른들이다. 아직 20대에 불과한 젊은이를 왜 나무라느냐 식이다. 그렇다. 젊음은 실수할 수 있는 시기이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젊은이들이게 실수할 기회를 준다. 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험을 쌓으며 세상에 굳건히 발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턴’이라는 제도는 그래서 존재한다. 그래서다. 176석을 거느린 거대 집권 여당 대표가 그런 실수를 하고, 경험을 쌓는 자리인가? 당 대표도 인턴이 있는가? 정치가 이렇게 장난처럼 희화화되고 유치해져도 되는가?(이준석으로 반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준석은 다양한 연령층과 색깔로 구성된 비대위를 만들 때 비대위원으로 발탁되었고, 지금 당 대표는 그 이후 10년간 나름대로 정치활동을 통해 쌓은 경력을 토대로 전당대회 투표를 통해 스스로 획득했다)
지금 299명의 국회의원실에는 수많은 인턴, 비서, 비서관, 보좌관들이 입법활동을 보조하고 있다. 하물며 국회의원 9급 비서가 되기 위해서도 인턴을 거친다. 몇 년동안 입법보조원으로만 고생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이 사람들 눈에 박지현은 어떤 사람일까?) 20대가 세상을 경험하면 얼마나 했을 것이며, 사람을 겪었으면 얼마나 겪었겠으며, 정치와 관련된 지식을 갖추면 얼마나 갖추었겠는가? 어디 국회만 그런가? 국내 대부분의 기업은 물론이고, 언론사 역시 인턴 제도를 운영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실력이나 자질이 안되는 사람들은 퇴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거대 집권 여당 대표인 비대위원장의 실수가 그저 “젊은이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퉁치고 넘어가도 되는 일인가? 학보사 기자 경력을 가진 신입기자를 편집국장에 앉히는 언론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신입사원을 대표이사에 앉히는 그런 기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 집권 여당의 비대위원장, 당 대표가 그런 하찮은 자리인가? 정치가 그야말로 애들 장난인가?
느닷없는 학벌 논쟁
이것도 모자라 이젠 학벌 논쟁까지 등장했다. 이 논쟁은 박지현 본인이 만들었다. 박지현은 지난 26일 <시사인> 유튜브 채널 ‘20대 여자’ 라이브 방송에 나와 “제가 춘천 한림대를 나왔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 ‘한림대 나온 애가 무슨 말(정치)을 하냐’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며 “지금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소위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인데, 그랬으면 정치판은 완벽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민주당 안에 들어와 이야기하는 것이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누구든지 학력을 따지지 않고 정치할 수 있어야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능력 평가 기준이 오로지 학벌이 돼서는 안 된다”며 “제겐 좋은 학교나 공부라는 것이 중요 이슈가 아니었고 사회에서 좀 더 배우고 싶어 학교에서도 해외봉사활동, 국토대장정 등 교내외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정말 어리둥절하다. 대체 어디에서 한림대 출신 운운하며 정치할 자격을 운운했다는 건지 박지현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박지현 주변에서? 학벌 문제를 논란거리로 제기할려면 공론장에서 벌어진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지현 스스로 문제를 만들기 전에는 각종 SNS나 커뮤니티 등 그 어디에서도 박지현의 출신 학교를 문제삼는 걸 본 적이 없다. 박지현의 발언은 전형적인 ‘역매카시즘’이다. 박지현의 역사를 짜깁기한 엉터리 추모글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은 졸지에 ‘학벌차별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박지현에 대한 모든 비판 역시 ‘학벌주의’로 몰려버렸다. 간단하게 비판을 잠재운 셈이다.
그나마 내가 목격한 박지현의 학벌 문제는 ‘한림대를 나온 주제에’라는 학벌 비하가 아니었다. 출생지와 출신 고등학교가 상이한 자료가 등장해서다. 이 자료는 박지현이 제공한 자료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일반 인터넷 사용자들이 만든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 어떻든 이런 자료가 나돌면서 출신지와 출신고등학교가 정확하게 어딘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한림대학교 출신이라는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박지현을 둘러싼 논쟁은 학벌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 박지현 스스로 ‘여성혐오’라는 방어막을 치고 숨어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다.
비겁한 어른들, 아부하는 어른들
두 개의 글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한림대가 어쩌고, SKY가 저쩌고’ 한 박지현의 발언 한 마디를 갖고 그동안 박지현을 비판하던 사람들을 졸지에 학벌주의자로 만들어버린 대표적 사례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역색깔론’ 즉 ‘역매카시즘’이고,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하는 ‘가스라이팅’이고, 푸틴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나치주의자로 매도해놓고 공격하는 ‘스키조 파시즘’과 유사한 행태다. 이들이 소속한 더불어민주당에는 학벌 무관하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경기 시흥갑 문정복 의원의 경우 2020년 총선에서 당선될 때 고등학교 졸업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고졸 출신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도 없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로 대한민국은 진보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 수준도 진보했다. 그런데 박지현 논쟁으로 갑자기 대한민국 국민들 수준이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정확하게는 국민들 수준은 그대로인데 박지현과, 박지현을 옹호하는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국민들 수준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국민들께 석고대죄할 일이다.
많은 시민들이 박지현을 비판하는 핵심은 ‘자질’과 ‘능력’ 문제다. 176석을 거느린 거대 집권 여당 대표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안된다는 비판이다. 수만가지의 정치 이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N번방 추적단 불꽃’이라는 상징 자본 하나로 박지현을 비대위원장이라는 자리에 앉힌 얄팍한 정치에 대한 비판이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팩트 체크가 되는 정보화 시대에 한 두 개의 팩트도 아니고, 짧은 문장이 총체적으로 엉터리 팩트로 뒤범벅된 그런 글을 올린 ‘형편없는 자질과 실력, 능력’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런 간단한 글 하나도 다른 사람 손을 빌려 올리는 ‘꼰대스러움’에 대한 비판이다.
이재명이라는 선구자의 길을 따라갔나?
이 모든 비판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학벌문제'를 꺼내들고,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을 ‘학벌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야비한 수법에 혀를 내두른다. 이 수법은 낯설지 않다. 이미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이재명이 선보인 바 있다. 검사사칭, 교회 집사 사칭, 무고죄, 패륜적인 쌍욕, 음주운전,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한 혜경궁김씨 사건, 논문표절, 김혜경씨의 불법의전, 법인카드 불법 사용, 잔인하고 흉폭한 살인범 조카에 대한 심신미약 주장, 성남시장 비서실 직원의 충북동지회 간첩사건 연루 구속, 조직폭력배 출신 수행 비서, 철거민 폭행 논란. 항의 방문한 장애인들 꼼짝 못하게 한 엘리베이터 정지 사건, 김부선씨와의 무상 불륜 논란 등 수많은 논란에 대해 ‘비천한 출신’ 운운하며 빠져나가려 한 바 있다.
또한 이재명의 열혈 지지자이자 수호대를 자처했던 나꼼수 출신의 김용민과 이이제이의 이동형은 ‘이재명이 국졸 출신이라고 무시한다’는 출처도, 근거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 그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학벌 논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멀쩡하게 소위 ‘SKY-서성한-중경외시’로 서열화된 학벌 사회에서 당당하게 10대 대학에 들어가는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사람에게 그 누가 국민학교 졸업 출신이라고 업신여겼다는 것인지 근거도, 출처도 없는 학벌 논란을 만들어내는 수법과 이번 박지현의 학벌 논란은 닮아 있다.
노무현을 아무데나 이용해먹지 말기 바란다
‘이재명이 국졸 출신이라 무시한다'는 근거도 없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박지현 스스로 제기한 ‘한림대 출신이라서’라는 발언은 많은 시민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정치인의 도덕성, 자질, 능력에 대한 비판을 야비하게 ‘학벌차별’ 프레임으로 전환해버린다. 이 프레임은 ‘노무현이 고졸 출신이라고 무시했다’는 역사를 재활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박지현은 학벌 논란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노무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을 차용했다.
어떤가?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연상되지 않는가? 노 전 대통령이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은 2003년 5월 18일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다 한총련이 정문을 봉쇄하는 바람에 뒷문으로 기념식장에 들어가는 등 파행이 벌어진 직후다. 이 사태로 김두관 당시 행자부장관이 탄핵당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수많은 시민단체가 온갖 요구를 봇물처럼 쏟아내고,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으로 지지층 절반이 갈려나가고, 전교조 나이스 파업과 화물연대의 대규모 파업, 여기에 길거리 시위가 그치지 않던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나 박지현의 발언은 어떤까? 문장 전체가 엉터리인 글을 잘못 올렸으면 남탓 하는 사과도 재차 사과를 하고 자숙해도 모자랄 판에 “아 못해먹겠네 이런 마음이"이 든다고? 어디서 벌써부터 책임감 없는 정치인들의 뻔뻔하고 못된 정치를 배웠는지 몰라도 박지현의 꼰대력은 왠만한 노회한 정치인들 뺨을 후려칠 기세다.
“민주당 쇄신하고 싶은 의원은 나에게 찾아오라”는 발언은 왠만한 꼰대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발언이다. 나이 많다고 무조건 꼰대인 것도 아니고, 나이 어린 꼰대가 많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전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박지현 스스로 증명해주고 있다. 나는 정치판을 들여다 본 이후 박지현을 능가하는 꼰대스러운 발언을 접해본 일이 없다. 심지어 정치판에서 꼰대력 최고봉인 이해찬이나 김종인도 이 정도 발언은 하지 않았다.
꼰대 586으로 젊은 꼰대 박지현에게 충고 한 마디 한다
일찍이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博學之(박학지) 널리 배우고
審問之(심문지) 자세히 묻고
愼思之(신사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明辯之(명변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篤行之(독행지) 확실하게 행하라
역대 대통령 선거 양자 대결에서 민주당 계열 후보로서는 노무현-문재인 다음으로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이 1시간에 걸쳐 설득해서, 그것도 그냥 비대위원도 아니고 비대위원장이라는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 앉은 건 박지현 본인 실수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지조차 분간이 안되면 공부를 더해야 하고,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감당 안되는 그 감투를 내려놓고 어디 국회의원실 인턴부터 시작하기를 권유한다. 의원회관에서 근무하는 3000여 명에 육박하는 인턴, 입법보조원, 비서, 비서관, 보좌관, 정당 실무자들만 해도 왠만한 국회의원들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당장 국회의원을 해도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최소 100명은 된다. 그 사람들 밑에 가서 인턴 훈련부터 받기 바란다.
꼰대 소리 들을까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젊은 사람들 눈치나 살피며 자기들 스스로 ‘후배 권력’을 만들어주고, 나이에 맞지 않게 ‘스윗 중년’을 떠들며 차원이 다른 개저씨력을 자랑하고, 남존여비 사회에서 남자로 태어나 온갖 혜택을 다 받고 살아온 주제에 가만히 입다물고 살지 않고 오히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자신이 높은 성평등 의식을 가진냥 포장질이나 하고, 젊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 따라 쓰면 소통한다고 착각하고, 젊은이들에게 아부나 하는 개저씨와 개줌마들이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좀체 듣기 힘든 조언이다.
박지현씨는 아부하는 어른들을 조심해야 한다. 당장 20대 여성 표 좀 모아서 뭘 해보겠다고(8월 전당대회) 박지현씨가 가진 상징 자본을 갉아먹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몇 달 안에 보게 될 것이다. 이건 박지현씨 또래의 자식을 둔 어른으로서 진심으로 해주는 조언이다. 꼰대스럽다고? 그래 나 꼰대다. 그래도 박지현씨의 꼰대력보다는 수준이 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