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부 유럽 기행 9. 독일 드레스덴(1)]
※현재 글의 정체성을 이리저리 시험해보는 중입니다. 대학 시절 여행하며 고민한 바를 풀어내고자, 일기 형식의 여행 기록과 소감을 그 여행지에서 떠올려 볼 만한 정치학적 지식과 결합해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특정 편에서는 여행 기록이 축소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에 대한 독자님들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댓글이나 이메일(kwonyj0204@hanmail.net)로 편하게 연락 주시면 충실히 고려하여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센의 중심, 독일의 피렌체
프라하에서 11시 40분 버스를 타고 2시간여를 달려 독일 드레스덴(Dresden)에 도착했다. 독일 동쪽 구석에 있는 도시 치고는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유명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 논란 많던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발언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유로 잘 알려져 있다. 드레스덴은 신성로마제국 시대 작센(Sachsen, Saxony) 선제후(Prince-elector)의 영지였다. 작센 선제후는 제국에 수배당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보호했으니, 드레스덴은 종교개혁의 요람이다. 유서 깊은 도시이기에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놓칠 수 없다.
참고로,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신성로마제국은 주교령(교회령)과 군소 왕국들의 연합체였다. 각 지방 통치자는 ‘제후’라고 불렀다. 이중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권을 지닌 강력한 소수를 ‘선제후’라고 불렀는데, 황제도 이들에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제국 내에 총 7~9명이 있었는데, 작센 선제후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이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가톨릭교회로부터 책임지고 보호해준 것도 모두 강한 힘 덕분이었다.
드레스덴은 예술이 발달해 ‘독일의 피렌체’라는 호칭도 갖고 있다. 동서 교류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동양 도자기를 들여와 자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도자기들은 츠빙거 궁전(Dresdener Zwinger) 내부의 도자기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드레스덴은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겪은 도시이기도 하다. 30년 전쟁(1618-1648), 7년 전쟁(1756-1763),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을 거치며 도시 전체가 반복적으로 파괴당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군수공장 역할을 했으며, 그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을 맞아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 때문에 옛날 건물들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다. 지금은 이 모든 비극을 극복하고 ‘독일의 피렌체’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햇살 드는 날이면 그 어느 곳보다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볼거리도 풍성하다. 관광명소가 밀집되어 있고 관광지구 규모도 크지 않아서 두 발로 산책하듯 여행하기에도 제격이다.
드레스덴 첫 방문 이야기
드레스덴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4월 21일, 이제 막 독일에 봄이 오던 시기였다. 1박 2일 일정으로 주말에 다녀왔다. 하필 부활절 연휴(약 5일)까지 끼고 있어서 버스가 비쌌다. 베를린에서 유럽 카풀 어플인 블라블라카(Blabla Car)를 이용해 왕복하기로 했다. 왕복 17유로밖에 하지 않아 말 그대로 ‘거저’였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호스트의 차에 타고 목적지까지 가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출발하는 날은 일요일이었다. 호스트는 아버지뻘 아저씨였는데, 흥미롭게도 뒷좌석에 노란색 유니폼과 깃발을 한가득 싣고 있었다. 자신은 드레스덴 축구팀 SG 디나모 드레스덴의 팬이어서 일요일마다 경기를 보러 드레스덴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이 팀은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는데, 이날 경기는 전 좌석 매진이었다. 아저씨 말로는 나라 전체가 축구에 “미쳐 있어서” 2,3부 리그도 주말엔 웬만하면 매진된다고 한다. 드레스덴 기차역에서 내려 작별하자마자,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깃발을 휘날리며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호스트 아저씨는 자기 팀 얘기에 눈을 반짝였는데, 저들과 함께 응원할 거란 생각을 하니 새삼 순수한 소년처럼 여겨졌다.
드레스덴에 도착해서는 미리 약속해둔 대로 베를린에 같이 교환학생을 온 신OO 형을 만났다. 형은 다른 이들과의 프라하 여행을 마치고 이곳으로 바로 넘어왔다. 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구시가(Innere Altstadt)를 한 바퀴 돌고, 츠빙거 궁전으로 가서 미술관과 도자기박물관을 오래도록 구경했다. 관광을 마치고선 내 숙소에서 함께 아라비아따 스파게티와 소고기 스테이크를 요리해 맥주와 곁들여 먹었다. 숙소 벤치에 앉아 함께 맞은 바람과 해 질 무렵의 햇살이 기억난다. 맑고 바람도 선선한 날이었기에 저녁 무렵 햇살을 맞으니 피로가 싹 풀렸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자면, 이 형과는 7월 중순에 내 기숙사 마당에서 노을을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드넓은 들판 뒤로 넘어가는 해는 하늘이 제 것인 양 사방을 불태웠다. 맥주 한 병씩을 손에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형은 “이야, 이 장면이 진짜 오래 기억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을 끝으로 나는 베를린에서 방을 빼고 중동부 유럽을 돌러 나갈 예정이었다. 노을과 함께한 그 마지막 장면은 나도 정말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식사 후 형은 본인 숙소로 돌아갔고, 나는 한숨 푹 자고서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숙소를 나섰다. 중앙거리(Hauptstrasse)를 따라 알베르트 광장(Albertplatz)까지 향하며 신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여유롭게 연휴를 즐기는 부모와 아이,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은 평화 그 자체였다. 정오 무렵 다시 카풀을 해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좋은 감정이 두 번째 드레스덴 여행을 할 때도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기온은 좀 높아졌지만, 이번에도 볕이 좋아서 전처럼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터에 밀린 강건왕
두 번째 방문에서 가장 먼저 성모 교회(Frauenkirche Dresden)를 찾기로 했다. 그러려면 중앙역 부근에서 신시가지를 지나 중심부 구시가지로 들어가야 했다. 오후 1시 반쯤 도착하여 먼저 신시가지의 한 케밥 가게를 찾았다. 전날 카토비체와 브로츠와프에서도 샌드위치 같은 간편식으로만 두 끼를 먹었고, 이날은 계속 공복이었다. 피에 굶주린 좀비처럼 축 늘어진 채로 케밥 가게로 달려갔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케밥을 뱃속에 넣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행복했다. 배고프게 여행하다 보면 익숙함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드레스덴 투어를 시작했다. 성모 교회는 츠빙거 궁전, 젬퍼 오페라 극장과 함께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성모 교회는 개신교 교회로서, 탁 트인 노이마르크트 광장(Neumarkt, New market)에 위치했다. 웅장한 교회를 배경으로, 광장 중앙에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터 동상의 오른편에는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August Ⅱ) 동상이 자리했다. 그는 본래 개신교(루터파) 신자였으나,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 작센 민중의 95%가 개신교 신자였기에 작센에 새로운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 동상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각기 다른 의미에서 관심을 가져 왔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2세는 강건왕(der Starke)으로 불렸다. 현명하진 않지만 우직하다는 의미에서 약간 비꼬는 호칭이었다. 예술을 숭앙하여 오늘날 드레스덴의 대표적인 건축물 다수를 지었다. 그러나 민중의 눈에 강건왕은 어디까지나 향락과 사치에 빠진 우둔한 군주일 뿐이었다. 그의 동상은 루터 동상에 밀려 광장 변두리에 서 있었다. 루터는 종교 ‘개혁가’였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강건‘왕’이었다. 개혁가는 민중과 호흡을 맞추지만, 왕은 민중에게 밉상스러운 존재다. 특히 심미욕이 강한 왕일수록 민중의 궁핍한 사정을 외면하기 쉽기에 더욱 그렇다. 광장에 놓인 두 동상의 위치에서, 역사의 참된 주인공은 절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진리를 떠올렸다.
작센이 루터를 보호하게 된 이유
- 루터의 종교개혁
우리는 광장의 루터 동상 앞에서 각자 사진을 찍고 성모 마리아 교회 내부로 입장했다. 출입이 자유로웠고, 오르간을 포함한 예배당 구조물들은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게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캐리어를 끌고 쉴 새 없이 이동했기에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드레스덴을 여유롭게 즐기려면 체력을 충전해야 했다. 예배당에 앉아 눈을 감고 마치 설교를 듣듯 오르간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앉아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작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토론했다. 루터는 어떤 인물이고 작센 지방에 어떤 의미이기에 작센 수도인 드레스덴 최중심지에 우두커니 서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까?
그는 작센이라는 지방의 자주성과 강대함, 개방성과 포용력을 상징했다. 그 맥락을 이해하면 드레스덴을 비롯해 유럽의 개신교 교회를 보며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야기는 루터가 ‘95개 조문’을 발표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근대국가들의 맹아가 형성되고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가톨릭 내부에서는 교황을 선출하는 협의체인 공의회를 만들어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오히려 독재적 행태를 보이며 사치를 즐겼다. 교황 자신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성직이나 면죄부를 판매하곤 했다. 면죄부를 사면 현세에서 저지른 죄가 사해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사실상 사기를 쳤다.
루터는 ‘신앙의 회복’을 외치며 교황 중심의 가톨릭이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중세 교황의 가장 큰 권위는 성서의 독점적 해석에 있었다. 교황을 중심으로 사제들은 독재적인 행태를 보였고, 면죄부 판매도 그 일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혁명적인 슬로건을 제시했다. 그는 성서로의 장벽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가로막는다고 여기며, 누구든 믿음만 있으면 성서를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황과 교회의 독점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물론, 교황에게 종교적 정통성을 의존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역시 큰 위협을 느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제국의 위험 인물로 낙인 찍혀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는 루터를 보호하기로 결단했다. 이는 제국에 큰 타격을 주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와 그 여파를 이해하려면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신성로마제국의 특성과 작센 왕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962-1806)은 중세판 유럽연합(EU)이라 비유되곤 하는 국가 간 연합체였다. 영토로만 따지면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했다. 그런데 이 제국은 결점투성이였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신성로마제국을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에 있지도 않으며, 제국도 아닌 어떤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박하게 느낄 수 있지만, 이 평가는 제국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냈다.
이 제국은 신성(holy)하지 않았다. 제국이 신성하려면 황제가 가톨릭의 우두머리 교황과 정통성을 공유해야 했다. 따라서 역대 황제들은 교황으로부터 공인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일련의 갈등을 거치며 교황과 황제는 상당한 긴장에 휩싸였다. 교황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와 일치하지 않게 된 셈이다. 종교 개혁은 제국의 종교적 권위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일부 제후들은 루터교를 수용하여 황제에 종교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들이 구교에서 신교로 개종하면서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은 무너졌다. 교회의 수호자를 의미하던 ‘신성’이라는 단어는 허울만 남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로마’도 아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옛 로마 제국의 이름이다. 그러나 제국 황제는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에 거주했으며, 로마는 교황청만 덩그러니 놓인 주변부 신세를 면치 못했다. 로마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해 자의적으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제국’도 아니었다. 황제는 선제후 간 경쟁과 타협으로 선출되는 구조였으며, 제후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중요 국면에서는 황제가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강력한 중앙집권을 갖춘 제국이라기엔 엉성했다. 황제가 통치권을 과도하게 행사하려고 하면, 지방 영주들이 반발해 전쟁을 일으켰다. 수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황제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뒤로는 아예 제국이 여러 국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 프리드리히 3세는 비텐베르크 대학을 독자적으로 설립·운영하여 독자적인 지적 기반을 갖추었으며, 그곳 교수이자 개혁가였던 마르틴 루터를 보호했다. 이로써 작센은 제국에 반대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하다는 자신감을 과시했다. 당대 ‘이단’이었던 루터의 사상을 수용할 만큼 개방되고 포용적이라는 광고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제국은 큰 위협을 느꼈고, 무리한 종교전쟁을 수행하여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 개인의 호의와 신념도 작용했겠지만, 그 아래를 떠받치던 거대한 정치적 구조를 빼고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논하기 어렵다.
정치적 현상을 명분만으로 파악하지 말자
무형의 긴장이 유형의 갈등으로 표출되려면 명분이 필요하고, 갈등의 결과를 정당화할 때도 명분이 필요하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명분을 내세워 다투는 이면에는 이미 일정한 이해 갈등이 응축되어 있다. 적어도 17세기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갈등 국면에서는 종교가 주된 명분이었다. 마르틴 루터를 둘러싼 공방은 그 시초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개시하자 황제 카를 5세(Karl Ⅴ)는 파문을 최소화하고자 제후국들에게 가톨릭 질서를 강요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를 포함해 이에 반대하여 개신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해 황제에게 대항했다. 황제가 구교 세력을 결집하여 반격하면서 슈말칼덴 전쟁(1531-1552)이 발발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황제의 가톨릭 연합군이 물러섰다. 그 결과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1555)를 통해 제후들은 자기 왕국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Cuius regio, eius religio: 그 통치자에 그 종교).
아우크스부르크 선언은, 현실적인 결과에 종교적 명분을 덧씌운 것에 가까웠다. 표면적으로는 각 분파의 종교적 정당성과 신앙의 자유 논쟁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핵심은 제후국 군주의 자치권 인정 여부에 있었다. 종교 결정권은 자치의 상징이었다. 구태여 명분을 내세워야 했던 이유는, 이긴다고 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민중의 힘으로 달성된다. 민중은 물자를 조달하고, 병력으로 차출된다. 그렇기에 통치자들은 적절한 명분을 동원해 승리를 정당화해야 한다. 절대다수 구성원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체제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명분은 당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워야 하고, 루터 시대의 패러다임은 ‘종교’였다. “그 통치자에 그 종교”라는 선언은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는 한편,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장치였다.
이후의 전쟁들도 저마다의 명분을 내걸고 세속 이익 확보를 도모했다. 프라하 편에서 소개한 30년 전쟁도 종교 수호를 명분으로 여러 국가가 뛰어들며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가 벌인 전쟁들이나 7년 전쟁에서는 왕위계승을 문제 삼았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프랑스혁명 당시의 ‘자유, 평등, 박애’를 ‘민족 해방’이라는 이념으로 확장해 내세웠다. 이를 통해 군소왕국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 양차 대전에서는 ‘민족자결’이, 냉전에서는 ‘사회주의/자유주의’가 각종 반인권적인 학살과 암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싸움의 표면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가 어떤 정치적 현상을 판단할 때는 명분을 넘어 이해관계까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명분 투쟁은 대개 선악 구도를 제기하는데, 이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곤란하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이해관계다. 물론 우리가 국가를 믿고 종교를 믿으며 그것에 따라 실제 삶을 만들어가듯이, 명분도 허구는 아니다. 다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유럽사에서 보듯이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한 이념은 거의 없다. 명분에만 천착하다 보면, 악마를 찾고 영웅을 기다리게 된다. 정치적 판단이 십자군 전쟁이나 팬클럽 활동으로 변질된다. 적대감만 난무하는 사회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는 뿌리내리기 어렵다.
월요일에 드레스덴(하)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