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시리즈가 되는 분위기인데 일단 휴일이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쓰기 힘들테니 최대한 써본다.
앞서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있는 도시국가 이탈리아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을 소개하고, 이어서 17세기 후반 영국의 피터지는 종교전쟁 한복판에서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홉스(Thomas Hobbs, 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관용론>까지 훓어봤다.
이번 글은 그 뒤를 이어가는 몽테스키외(Montesquiey, 1689-1755)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오늘날 프랑스 체제를 만들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서 전국의 귀족들을 강제로 모두 불러모아 매일 연회나 즐기면서 절대왕정체제를 구축했다. 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술이나 마시고 놀다가 모든 권력을 루이 14세한테 빼앗겼다. 이 시기 프랑스만큼 중앙집권이 이뤄진 나라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베르사유 궁전은 정말 대단한 기획이었다.
여타 유럽 국가들은 ‘왕-귀족-시민’으로 구성되는데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시민’의 구조가 된다. 그래서 토크빌은 프랑스에서는 입헌군주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앉았던 자리의 주인만 바뀌었다. 루이 14세 이후를 보면 이렇게 계보가 이어진다.
루이 14세-루이 15세-루이 16세-로베스피에르-나폴레옹-루이 18세-나폴레옹 3세-프랑스 3공화국(1870년)
즉 권력의 핵심에서 귀족은 사실상 제거됐다.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던 시기에도 대통령은 존재했다. 아마 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오늘날 프랑스 정치체제는 루이 14세가 구축한 절대 왕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걸 우리는 ‘경로의존성’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도 여러 차례 입헌군주제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 이유는 루이 14세 때 왕과 국민이 직접 연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체제의 특징인 국방, 조세를 놓고 보자. 봉건체제는 뜯어먹는 놈들이 많았다. 왕, 귀족, 영주 등등 여기저기서 뜯어먹었는데 이제 뜯어먹는 창구가 단일화됐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게 더 편하지 않겠나?
어떻든 프랑스 혁명도 결국 돈 문제인데, 혁명의 시작이 된 삼부회도 돈이 필요해서였다. 프랑스는 미국에서 캐나다를 놓고 영국과 한판 붙었는데 패배했고,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1783년의 미국독립전쟁에 뛰어들어 미국을 지원했다. 국고가 비었다. 채워넣기 위해 귀족들한테 손을 벌렸는데 협조는 하지 않고 법원에 공을 넘겼고, 법원은 삼부회 열어서 알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1614년을 마지막으로 문을 잠궈놨던 삼부회를 프랑스 혁명 직전에 소집했다. 당연히 누가 좋아하겠나?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시민으로 구성되는데 절대왕정 체제가 구축되면서 성직자나 귀족들은 끽소리도 못하고 지내왔는데 돈 떨어졌다고 모이라고 했으니 좋은 소리가 나올리 없하다.(삼부회를 소집한 게 1789년 5월이고 7월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8월에 봉건제 폐지를 선언한다.)
프랑스가 궁핍해진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가 있다. 앙리 4세(1553-1610)가 1598년 4월에 프랑스 남부 지방의 칼뱅주의 개신교인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칙령을 선포해 종교전쟁을 중단시켰는데 1685년에 루이 14세가 이걸 없애버렸다.
이와 관련해서는 1994년에 개봉한 이자벨 아지니 주연의 영화 ‘여왕 마고’를 보면 도움이 된다. 마고는 앙리 4세의 부인으로 이 영화는 위그노 대학살이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이 때 위그노 2만 명이 학살당했다. 앙리 4세는 이 학살을 겪고 나서 낭트칙령을 선포했다. 앙리 4세는 루이 14세의 할아버지다. 즉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평화를 깨트리고 인재 유출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하니 당연히 국부도 줄어들고,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농업 중심의 국가로 발전한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도 중농주의학파가 전부 프랑스 학자들이다.
몽테스키외의 외침 “군주의 권한도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
영국은 찰스 1세가 청교도 혁명 때 크롬웰한테 목이 잘렸다. 그 아들인 제임스 2세는 오렌지공 윌리엄과 메리 2세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명예혁명이다. 영국은 일찍이 세금을 부과할 때 반드시 의회의 동의를 받는 관습이 확립됐다. 1215년 존(Jhon, 1166-1216)왕이 의회와 붙었다가 패배하면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사인을 했다. 마그나 카르타 내용은 정말 대단하다. 내가 전공한 법학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교회는 국왕으로부터 자유롭다.
-왕의 명령만으로 전쟁 협력금 등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
-런던과 다른 자유시들은 자체적으로 관세를 정한다.
-왕은 따로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남 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
이 서역사가 그대로 지켜졌을리는 없다. 왕권의 크기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래도 의회를 존중하는 관습은 존재했다.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왕권이 강력하지 않는데도 이걸 무시했다가 큰 일을 치른 셈이다. 이후로 영국은 왕권과 의회가 적절하게 공존했다. 입헌군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토대가 됐다. (존 왕은 영국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인물이다. 존 왕을 제외하고 아무도 존이라는 왕호를 쓰지 않아서 그냥 존 왕이라고 부를 정도다.)
반면 프랑스는 이런 타협의 과정도 없었고, 완충장치도 없었다. 1700년대에 들어 다양한 사조가 일어났다. 영국에서 홉스와 로크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글을 발표한 가운데 프랑스에서도 1721년 루이 14세의 전제정치를 비판한 <페르시아인의 편지>라는 글이 익명으로 발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몽테스키외다.
서간체 소설인 <페르시아인의 편지>에는 조세문제, 화폐문제 등 경제문제를 비롯해서 전제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종교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와 같은 맥락이다.(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는 책을 구입해서 읽어봤지만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활약하던 지식인들로는 장 자크 루소(1712-1778), 볼테르(1694-1778), 디드로(1713-1784), 달랑베르(1717-1783) 등 ‘백과전서파’로 알려진 쟁쟁한 인물들이 프랑스의 미래를 고민하는 다양한 지식을 생산하던 때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 홉스는 국민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절대군주가 필요하다고 했고, 로크는 정당성 없는 국가 권력은 엎어버릴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고 소개했다.(민주주의 이론과는 무관하지만 문득 맹자의 역성혁명론이 생각나고, 이를 행동에 옮긴 정도전이 떠오른다. 사람들 생각은 비슷하다.)
반면 몽테스키외는 루이 14세와 15세로 이어지는 절대왕정의 폐해를 보면서 ‘절제된 정부’, 즉 권력 남용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고민한다. 홉스와 로크, 몽테스키외가 처한 현실이 다르니 해법도 다르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 결과물이 권력분립이다. 즉 권력이 권력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말하는 견제와 균형이다.
몽테스키외도 홉스나 로크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지만, 프랑스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문화 등을 살피면서 대안을 모색했고, 그 결과물이 1748년에 출간된 <법의 정신>이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통해 프랑스의 문제점을 제기한 이후 그 대책을 잦기 위해 2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연구한 결과물이 바로 <법의 정신>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3권 분립’이 담겨 있고, 몽테스키외의 노력은 미국 건국 헌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헌법이 3권 분립을 제도화한 이후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헌법은 3권 분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몽테스키외의 주요 관심사는 절제된 권력, 즉 권력 남용의 제한이다. 절대왕정의 폐해를 겪고 있던 프랑스인 몽테스키외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대책인 셈이다. 홉스와 로크의 영국은 이미 관습적으로 왕권과 의회가 타협을 했기에 자연스럽게 입헌군주제로 넘어 갔고, 프랑스는 왕권의 존재를 상수로 놓고 무소불위의 왕권을 견제하고 분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연구하게 되었다.
몽테스키외가 도달한 결론은 절대 왕정을 제어할 수 있는 중간 권력, 즉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해 왕권과 균형을 맞추는 시스템이다. 즉 군주정을 전제로 귀족정을 강화하는 것인데 결국 영국의 로크가 도달한 지점과 비슷하다. 몽테스키외 본인이 귀족 출신이기도 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어떻든 진보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루소처럼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인민주권론을 펼치는 급진적인 진보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몽테스키외를 진보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몽테스키외의 주장은 단순하게 귀족 권한을 키운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중앙의 왕한테 집중된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하자는 취지였다. 오늘날의 지방분권과 맥을 같이 한다. 몽테스키외의 이 논리는 미국 건국자들에게 반영됐다. 건국 헌법을 제정할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이냐를 두고 ‘연방주의자’(Federalist)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이 극렬하게 논쟁했는데 최종적으로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했고 오늘날의 미국식 연방제가 탄생했다. 몽테스키외가 꿈꾼 세상이 미국에서 실현됐다.
이 연방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바로 링컨 대통령 당시의 남북전쟁(1861-1865)이다. 링컨이 진보, 보수 진영을 떠나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미 연방을 지켰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국민통합 말이다.
우리는 이재명을 통해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성남시장 당시에는 의회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면 교묘한 거짓말로 성남시 의원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길거리에 효수하듯이 SNS에 이름을 올려 집단 공격이 가해지게끔 유도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민주당이 거의 모든 의석수를 차지한 경기도의회가 어떻게 권력 견제에 취약한지, 3권 분립이라는 시스템도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음을 우리는 2018년 이후 경기도를 통해 충분히 목격했다.
1700년대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지켜보며 권력 견제 시스템을 연구했던 몽테스키외가 300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성남시와 경기도를 보았다면 자신의 이론을 좀더 정교하게 다듬지 않았을까? 현재의 3권 분립으로도 권력 남용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보았다. 좀더 정교한 권력분립론을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업이 따로 있어서 못한다. 정치학 전공자들이 좀 해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