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1960년 9월 총선에서 민주당 신파와 구파가 경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하원) 233석 가운데 175석을, 참의원(상원)에서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여기에 무소속 상당수는 공천에서 탈락한 신파와 구파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외형적으로는 민주당 일당독재체제라고 부를만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당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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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史)① 1955년 민주당 창당에서 1960년 분당까지
민주당, 5년 만에 민주당(신파)과 신민당(구파)으로 분당
당장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총리로 같은 파인 김도연을 지명했다. 권력을 균형있게 나눠가져야 한다며 장면 총리를 밀었던 신파는 당연히 반발했다. 재적 227명 중 224명이 투표했고, 가 111, 부 113, 무효 1표로 부결됐다. 윤보선은 장면을 다시 지명했고 재적 228명 중 225명이 투표해 가 117, 부 107, 기권 1표로 인준을 받았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신파와 구파 모두 서로 배신자를 찾는가하면 본회의장에서 난투극과 할복 사태가 펼쳐졌다. 신구파가 내각을 놓고 다투다 협상이 결렬되자 장면은 신파로만 구성된 내각을 발표했다. 반발에 부딪치자 구파 4명을 내각에 포함시켰지만 분당 사태로 치달았고 구파의 김도연, 유진산 등은 신당 창당에 나섰다. 당명은 ‘신민당’이었다. 신민당은 나중에 ‘민정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1965년 한일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민주당과 다시 합친다. 합당한 정당명은 ‘민중당’이다.
<참고>
-구파 : 민주당 창당의 주축 세력인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 출신들로 윤보선,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유진산, 김영삼 등
-신파 : 외부에서 참여한 재야파, 자유당 탈당파, 관료와 법조인 출신들로 구파에 비해 평균 연령이 10살 정도 어려서 신파라고 불렀다. 장면, 정일형, 김대중, 박순천, 이철승 등
이 난리를 친지 불과 5개월 뒤 군사쿠데타가 발발해 신구파의 격렬한 투쟁도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윤보선은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군 병력 4만 명으로 서울을 포위하면 박정희의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 있다며 야전군 동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해 준 것이다. 윤보선은 국군간의 교전이나 북한의 침공을 우려했다고 변명했지만,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윤보선은 극구 부인했다. 1982년 2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측이 지지성명을 내달라고 했지만 거부했고, 계엄령을 추인해달라고 해서 이것도 거부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는 “장면 총리의 얘기를 듣고 또 민주당 정부에서 반대하는 기미가 없는데 나 혼자 힘을 쓸 수가 없어 결국 추인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도 윤보선은 주한미군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요청을 받고 이를 승인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1962년 헌법을 개정해 정당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후보자의 정당 추천제를 의무화하고, 선거공영제를 도입해 선거비 보전을 시작했다. 동시에 군소정당 난립을 막기 위해 정당 설립 요건을 강화했다. 와중에 선거공영제라는 좋은 제도가 도입된 점도 기억할만하다.
민주당, ‘반이승만’ 깃발에 의존하다 분당
민주당이 이렇게 단기간에 분당을 하고 다시 합당하는 과정을 거친 이유는 상이한 정치철학을 가진 세력이 ‘반이승만’이라는 깃발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데, 현재의 더불어민주당도 이질적인 세력이 오직 ‘반국민의힘’이라는 깃발로 모여 있다. 개인적으로는 분당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이승만=민주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 때도 있었다. 바로 1955년 창당에서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까지다. 그 이후에는 공통의 깃발이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민주당이 신민당과 양당 체제로 재정립하는 정계개편은 필연적이면서도 당연했다. 결코 해서는 안되는 분열을 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민주당이 하나의 정당을 유지했다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군사쿠데타가 벌어지기까지 대한민국은 시위 천국이었고, ‘시위 좀 그만 하라’는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극도로 혼란한 양상을 보였다. 대중은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온갖 요구를 분출했는데 마치 프랑스혁명 직후 나폴레옹이 집권하기 전까지의 프랑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2017년 이후 한국은 어떨까? 촛불혁명이라는 거창한 포장지를 씌워놓고 저마다의 촛불을 외쳤던 시대는 아니었을까?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시민들보다 앞서가지도, 그렇다고 아주 뒤쳐지지도 않으면서 광장의 분출하는 에너지에 질식당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질서있게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2018년 이해찬 체제 등장 이후 민주당은 여전히 혁명의 열기에 도취한 시민들과 함께 난동을 부리는 정당으로 변모했다. 엉터리 지식과 뇌내망상 가득한 언설로 도배된 유튜버와 팟캐스터를 제도화하며 사회 담론 구조를 타락시켜 버렸다. 검수완박은 그 결정체일 뿐이었다.
참고로 4.19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했던 9개월 동안 벌어진 시위는 총 1,835회로 하루 평균 7회였다. 1960년 10월 11일에는 학생들에 의해 국회의사당이 점거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민주주의를 내걸었던 정부는 사회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도 모른채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같아 보이지 않나?
(부록)이재명은 윤보선의 길을 가고 있다
일전에 쓴 글에서 이재명은 김대중과 노무현처럼 승리자의 길이 아니라 이회창, 정동영 등 패배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쓴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이재명의 행보와 가장 흡사한 전례는 윤보선이다. 윤선은 1963년 10월에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나서 공화당의 박정희한테 1.4% 차이로 아깝게 졌다. 득표수 차이는 156,026표에 불과했다.
이 당시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를 향해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함께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공격한 사람이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옹호했지만 이후 등을 돌려 박정희 공격에 나섰다. 그러자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이 5.16 쿠데타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며 폭로전으로 맞섰다.(이와 관련해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윤보선의 색깔론은 미 군정시대의 한민당이 김구 등을 공산당으로 몰아갔던 공포정치의 어두운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면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투표자수가 증가한 점이나 상대방의 득표율, 역대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을 싹 빼놓고 이재명이 마치 대단한 득표를 올린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명 지지자들 방식대로 하자면 윤보선이 가장 최소 득표차로 패배한 후보였다. 그러면 이재명 지지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득표율을 비교했다.
민주당 계열 대선 후보 중에서 역대 최다 득표율은 노무현의 48.91%, 그 다음이 문재인의 48.02%다. 이재명은 득표율에서 고작 3위다. 그러면 또 득표수를 갖고 역대 최다라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당연한거다. 유권자 수가 계속 늘어나서 노무현 때와 비교하면 무려 900만 명 넘게 증가했다. 노무현과 이재명의 득표수 차이는 400만표다. 그래서 득표수는 의미가 없고 득표율로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더구나 당연한 걸 자랑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숫자로 증명해도 이재명 지지자들에게는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기는 하다.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시 돌아와서 윤보선 이야기다. 불과 1.5%에 15만표 차이로 아깝게 패배한 윤보선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면서 ‘국민의 정신적 대통령’을 자임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꽃다발을 보냈다가 당선 무효 및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박정희 정권의 관권 부정선거를 감안하면 윤보선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이런 정신승리가 1967년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1967년 대선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선거이기도 하다.
이재명과 민주당은 0.73%의 근소한 차이를 이유로 ‘졌잘싸’를 아직도 외치며 ‘이재명이라서 이 정도라도 싸웠다’며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2022년 대선은 ‘이재명이라서 패배했다’가 맞다. 윤석열은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내놓은 역대 후보 중에 최약체였다. 누가 나가도 이길 수 있는 후보였다는 게 사실에 부합한다.
생명력 있었던 신민당의 14년
앞서 말했듯이 1965년에 한일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야권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윤보선의 민정당(민주당에서 분당한 구파)과 민주당(남아있던 신파)이 다시 합쳐서 민중당을 창당했다. 1955년 민주당을 창당해 1961년 분당한 이후 4년 만에 다시 단일 야당이 된 것이다.
통합 당시 의석수는 민정당 47석, 민주당 15석으로 윤보선이 우위였다. 그런데 창당 전당대회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갈등을 벌인 끝에 박순천이 당 대표가 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민중당을 탈당해 신한당을 창당했고, 1967년 대선에 신한당 후보로 다시 출마했다.(1961년에도 윤보선의 구파가 탈당해서 신민당을 창당했고, 민정당으로 당명을 바꿔서 잔류 민주당과 다시 합당했는데, 또다시 분당한 것이다. 뒤에 나오겠지만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신한국당으로 나가고 남은 꼬마민주당,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서 나가고 남은 잔류민주당을 포함하면 세 번의 잔류민주당이 있었다.)
민중당에서는 유진오를 내세웠다. 유진오는 건국헌법 초안 작업을 한 법학자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진보의미래’ 집필작업을 할 때 유진오 박사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유진오 박사의 헌법 초안이 담긴 고문서를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건국헌법 초안에 대해 극찬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도 그 책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다시 야권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1963년 대선 당시에는 허정, 송요찬 등 군소정당 후보들이 알아서 자진사퇴하면서 윤보선으로 단일화된 바 있었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중당이 먼저 신한당을 향해 통합을 제안했다. 협상 끝에 대권은 윤보선, 당권은 유진오로 정리하고 통합당명은 신민당으로 정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신민당이 탄생한 것이다.
윤보선은 신민당 간판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결과는? 직전 5대 대선에서 15만표 차이었는데 6대 대선에서는 116만표 차이로 박살났다. 여촌야도 현상이 있었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도 박정희 득표율이 대폭 상승했다. 여촌야도 현상이 무력화된 선거였다. 윤보선은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당권을 쥐자 다시 탈당해 국민당을 창당했다가 문을 닫은 이후 문익환 등과 재야에서 활동했다.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곧바로 연임 제한 규정을 폐지하는 개헌에 착수해 1969년 10월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 결과 77.1%의 투표율에 65.1%의 찬성으로 연임 제한 규정이 사라졌다.
윤보선이 나갔지만 신민당은 1980년까지 야당의 구심점이었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이 상호 경쟁하면서 유신정권에 맞서는 야당으로서 존재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45.25%(5,395,900표)를 득표했지만 53.10%(6,342,828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바로 이어 5월 25일에는 총선이 있었다. 이 때 전국구 후보 배정을 놓고 ‘진산파동’이 있었고, 유진산이 당수에서 퇴진한 이후 누가 당수가 될 것이냐를 놓고 신구파 간에 격돌이 있었다. 그 결과 구파인 김영삼과 이철승이 밀었던 김홍일이 신파의 김대중을 이기고 당권을 가져갔다. 김홍일은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이어 1972년 10월 26일에 유신헌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11월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91.5%츼 찬성으로 통과됐고, 박정희 독재체제가 시작됐다. 1974년 신민당은 김영삼이 총재로 취임하면서 선명한 유신체제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는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도하면서 이를 자신의 재신임과 연계했다. 그 결과 79.8의 투표율에 73.1%가 찬성해 유신헌법이은 국민들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했다. 형식적 민주주의, 다수결 민주주의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현재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바로 박정희식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당원들 지지만 받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태세다. 대표적으로 부패범죄로 기소될 경우 당 대표직이 정지되는 규정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박정희의 유신헌법 제정은 물론이고 찬반투표와도 닮아 있다.
1985년 김대중-김영삼의 민추협, 신민당 창당
1979년 10월 26일, 유신헌법이 의결된지 딱 7년 되던 날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제거된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김영삼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그 빈자리를 이민우 등이 버티고 있었다. 양김은 물밑에서 움직였다. 1983년 김영삼은 5.18 3주년을 맞아 23일 간의 단식투쟁을 했다. 워싱턴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연락을 해 '김대중-김영삼 8.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양 진영이 힘을 합쳐 반독재투쟁을 하기로 하며 그러다 1984년 5월 17일에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결성한다.
이어 민추협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 작업에 나서 1985년 1월 18일 신당 창당대회를 열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원래 유신정권 때 당명인 신민당을 그대로 사용하려 했지만 선관위가 접수를 거부하면서 신한민주당으로 당명을 정했다. 신민당의 정강 정책은 일체의 독재와 독선 배제, 지방자치제 조기 실시, 언론기본법 폐기, 군의 정치적 중립이었다. 2월 8일에는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이 전격 귀국했다. 이어 2월 12일 제 12대 총선이 열렸고 신민당은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 등 총 67석을 획득해 곧장 제 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대구에서도 3개 지역구에서 유성환(1986년 국회에서 통일이 국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면책특권도 무시당하고 국보법으로 구속됐다.)과 신도환 등 2명이 당선되기도 했다.
그 이전 제 1야당이었던 유치송의 민한당은 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 등 35석에 그쳤다. 특히 수도권에서 거의 모든 후보가 민정당과 신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며 궤멸당했다. 이 당시는 중대선거구제로 한 선거구에서 2위까지 당선됐다. 사실 민한당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유신정권 당시의 신민당 출신이기도 하다. 원래 같은 뿌리라는 이야기다. 다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는 동안 유치송이 당 대표로 있는 민한당에 잠시 의탁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이 때 낙선한 민한당 국회의원으로는 정대철, 조세형, 김덕규, 조윤형, 서청원, 한광옥, 신상우 등이 있고, 당선자로는 이중재, 김정길 등이 있다. 이들은 총선 이후 모두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신민당은 103석을 가진 야당이 됐다. 민한당은 유치송 등 단 3명만 남았다가 1988년 총선에서 전원 낙선한 뒤 해산했다.
탈당과 창당의 반복은 필연적인 정치행위
분열 후 국민들은 대의명분을 가진 정당을 키워준다
대의명분을 가진 탈당 세력이 기존 정당 밀어내고 주도권 가져
신민당 창당과 민한당의 붕괴를 보면 결국 국민들의 투표로 여당에 맞서 싸울 야당을 선택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민한당은 현역 의원들이 신민당에 비해 월등히 많았지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야당으로서 실패했고, 국민들은 새로운 야당을 원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신민당을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만들어줬다. 결국 누가 국민들에게 와닿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거기에 걸맞는 정치행위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정당의 의석수는 국민들의 판단 근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국민들은 단순히 의석수가 많은 세력을 밀어주지 않는다. 국민들 요구에 부합하는 세력을 밀어줘서 주도권을 쥐어준다.
이후에 벌어진 일을 봐도 이는 명백하다. 1987년 이민우 파동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은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주도권은 탈당 세력인 통일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신민당은 곧 망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간에는 나름대로의 대의명분 싸움이 있었다. 그러나 대선에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모두 패배한다. 이 사건 하나만 갖고 자칭 민주진보개혁 세력은 ‘진보세력은 분열로 망한다’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 이 때는 물론 양김이 단일화를 했으면 승리할 가능성은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당시의 득표수만 합쳐서 계산할 문제는 아니다. 단일화 가능성이 커졌다면 전두환과 노태우의 민정당도 다른 방도를 궁리했을 것이다.
어떻든 자칭 민주진보개혁 세력이 떠드는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명제는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다. 이 말을 뒤집어서 ‘진보는 하나가 되면 승리했다’가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이는 하편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990년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민정당, 공화당과 합쳐 신한국당이 탄생하고, 잔류한 꼬마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창당된다. 그리고 1992년 대선에서 다시 패배한다.
이어 통합민주당은 1995년 김대중 세력이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분열했고 주도권은 새정치국민회의로 넘어간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원조 보수인 김종필과 힘을 합쳐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다. 진보세력의 단일화로 이긴 게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기존 정당을 깨고 나간 사람들이 패배한 사례가 오히려 드물다. 탈당 세력들은 국민들에게 와닿는, 혹은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 철학과 가치, 즉 대의명분을 내세워 주도권을 쥐었다. 신민당이 그랬고, 통일민주당도 그랬다. 평화민주당도 당을 깨고 나간 직후에는 패배했지만, 그 이후 또다시 통합민주당을 깨고 나간 새정치국민회의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리고 민주당의 정통성을 가져갔다.
2003년 열린우리당도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나가 극소수 여당으로 출발했지만 국민들이 다수 여당으로 만들어주었다. 기존 정당을 깨고 나간 세력이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 국민들이 힘을 실어준다. 이재명이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빠져나가는 답변으로 주로 써먹는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들이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진실이다. 이재명은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기 위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지만 맞는 말이기는 하다.
다음 글에서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이후 탈당과 신당 창당의 역사를 자세히 정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