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반지하에 살던 40대 여성과 10대가 익사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총각 시절 친구랑 같이 자취를 했는데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반지하는 입구부터 어두침침하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 그나마 내가 살던 반지하는 창문이 주인집 잔디밭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창문을 열어놓으면 환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주말이면 창문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하고 깨끗해진 방안에 누워 책을 읽고 낮잠을 자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보통의 반지하는 그렇지 않다. 햇빛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집이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반지하도 아니고 그냥 지하집도 많았다. 내가 결혼하고 처음 살던 일산의 먹자골목 3층 건물 지하에는 완벽한 지하집이 두 가구가 있었다. 나도 돈이 없어서 1층 식당 음식 냄새가 올라오는 2층의 9평 남짓하는 작은 방 두 칸 짜리에서 신혼을 시작했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식당이 오픈하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하고는 했다. 최소한의 인간의 삶을 지킨 셈이다.
반지하도 아닌 지하집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다 한번 내려가봤는데, 지금이야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그려려니 했다. 돈이 없어서 형편에 맞는 집을 고르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시 공부할 때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집단 수용소 같은 고시원에서 살았다. 넓다란 공간에 3층짜리 철제 침대가 마치 숲처럼 빽빽하게 늘어서있고, 150명 건장한 젊은이들이 온갖 냄새(발냄새, 땀냄새, 옷냄새, 양말냄새 등등)를 공유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음식 냄새 올라오는 그 2층집도 엄청 좋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사회에 큰 불만은 없었다. 내 신세를 한탄한 적도 없었다. 부모한테 물려받아서 아파트니 빌라니 하는데서 신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을 빼놓고는 다들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직장 생활 이후 저축도 하고, 그래도 객지 생활한 이후 처름으로 사는 것처럼 사는 내가, 조금씩 나아지는 내 삶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았다. 건방지게도 아이들 엄마한테 우리는 안정된 직장도 있고, 전체적으로 보면 두 사람의 월급을 합치면 상위 20%(아마 10%는 될거다)에 드는 사람들이니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하면서 살았다. 집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왜 못피했냐고? 참 어이가 없지만 이해는 한다. 윤석열이 반지하의 삶을 알겠나? 반지하 자체를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윤석열이 살았던 연희동은 부자동네였으니까.(근데 이 사진을 공보물로 사용한 홍보수석실의 공감능력 없는 놈들 전부 짤라라. 능력 없는 놈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서 하는 짓들이 아주 가관이다. 국민들 열받게 할려고 작정한, 윤석열 안티들만 모아놓은 집단인듯 하다.)
반지하가 있는 집은 대부분 평지가 아닌 경사진 곳에 있다. 그러니 이번처럼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지면 모든 곳이 물길로 바뀐다. 반지하에 물이 들이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건장한 청년도 겨우 몸만 빠져나올 정도로 물의 힘은 강력하다. 윤석열만 그렇겠나? 비탈진 산동네에서 살면서 거센 물살을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반지하에 살아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나? 난 이해한다. 사람은 경험의 한계에 갇히기도 하니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휴머니즘을 뽐내는 인간들이 더 역겹다. 자기들은 무결점, 무오류의 인간인냥 타인의 실수에 송곳같은 잣대로, 마치 자신은 정의의 사도인냥 굴어대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그저 씁쓸할 뿐이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다 비슷히다. 니들만 착한거 아니구요.
송영길이 2021년 6월에 광주 철거현장에서 붕괴 사고가 나서 버스를 덮쳐 사람이 죽었을 때 윤석열이랑 비슷한 말을 했다. "운전사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액셀러레이터만 조금 밟았어도 (희생자들이) 사실 살 수 있었는데”라고. 나는 크게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송영길의 발언도 그 표현이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 본심은 안타까움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은 엄청 인간적이고,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깨끗하게 살지만 타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송영길 같은 발언이 나오면 아주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고는 하는데, 정말 각박하고 살벌한 세상이다. 어떤 인간이 타인의 비극 앞에서 그 비극을 가볍게 여기겠는가? 극소수의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인간의 감정은 다 비슷하다. 그러니 다들 좀 너그러워져라.
2001년 어느 언론사에 다닐 때 내가 팀장을 맡고 있던 팀에 막내로 입사한 기자가 있었다. 이 후배 역시 사연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가진 자본이 없으니 반지하에서 살았다. 행정고시 국제경제 부문에 응시하다 2차에서 연거푸 낙방한 뒤에 입에 풀칠할려고 신문사에 입사했다. 이제 갓 취업을 했으니 당연히 대학생 시절 살던 집에서 살았고, 그 집이 신림시장 골목에 있던 반지하였다. 어느 날 출근시간이 다 되어 연락이 왔는데 울먹울먹거리면서 자기가 사는 집에 급류가 들이닥쳐서 겨우 몸만 빠져나오고 모든 세간살이가 물에 잠겼다고 한다. 나는 그 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감이 안왔다. 시간이 지나서 신림시장 골목이 쑥대밭이 됐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 참상을 알게 되자 그 후배의 울먹거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다음날 만난 그 후배는 절망감에 쌓인 표정이었다. 그래 그 절망감 이해한다. 가진 거 없는 놈이 그나마 있던 세간살이가 몽땅 물에 잠겼으니 어찌 절망감이 들지 않겠나. 이게 2001년 7월의 일이다. 그 당시 기사를 보자.
이번에 신림동 반지하에서 벌어진 참사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2001년 7월에는 시간당 270미리가 넙는 폭우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300미리였다. 당시에 내린 270미리도 어마어마했고,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5위 기록이었다고 기사가 나왔다. 순식간에 급류가 들이닥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은 자연재해가 닥치면 방법이 없다. 미리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2001년에도 하수구 이야기가 나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하수구가 원활하다고해서 이번처럼, 2001년처럼 엄청난 폭우가 내리면 감당 못한다. 물병에 물만 담아봐도 안다. 수도꼭지를 약하게 틀고 물을 담으면 넘치지지도 않으면서 담기는 속도도 느리지만, 가장 세게 틀어놓고 담으면 물이 넘치면서 순식간에 담긴다. 나는 지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지진이나 산사태, 해일을 보면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 장난감인가…
2001년 이 당시 반지하에 살고 있던 40대 여성 등 3명이 숨지는 등 수도권에서만 총 40명이 죽고 14명이 실종됐다. 이번 폭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시장 골목으로 사나운 급류가 흐르고, 통나무도 떠내려 올 정도였다.
이제 본론으로 가자. 이 때는 김대중 정권이었다. 그러면 이 때의 비극은 김대중 때문인가? 우리 정치는, 특히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 정당의 강고한 지지자들은 각자가 야당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정권 욕하느라 바쁘다.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진영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기들이 싫어하는 정당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거침없이 활용한다. 대단히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인 행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페이스북에서 이빨이나 털고 있는, 고매한 인격 드러내며 대통령이 어쩌고, 정부가 저쩌고 하면서 준엄하게 질타하는 그 삿된 목소리야말로 가장 비안간적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쓰레기들이다.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양 정당의 고정 지지층 행세를 하면 정치를 타락시키고, 진중하게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재난마저 정략의 소재로 소비하고 만다.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2001년에 벌어진 일이 규모는 조금 축소됐지만 2022년에 그대로 일어났다. 그동안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5개 정권이 지나왔다. 누구 책임인가? 어느 정권 책임이고, 어느 정당 책임인가? 이런 거 따지는 게 좀스러워보이지 않나? 2001년과 2022년은 달라보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똑같다. 2022년은 2001년 복제판이다.
아무도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다. 우리 공동체는 매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래서 점점 안전한 사회가 되고 있다. 한국은 결코 절망적인 사회가 아니다. 자기비하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뀌고, 지도자가 이리저리 교체되는 동안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누구도 해결책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다. 정쟁에 휩쓸려 공동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 일회성으로 소비되고,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린다. 정적이 추진했던 정책이라고 엎어버리거나 축소하고 아예 뭉갠다. 나쁜 놈들이고, 이런 나쁜 놈들이 나쁜 정치를 한 결과다. 그리고 이런 나쁜 정치를 진영논리로 말을 바꿔가며, 논리를 바꿔가며 변호했다가, 비판했다가 왔다갔다하는 쓰레기 지지자들이 쓰레기 정치를 만들고 있다.
2001년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2001년 7월 15일 오전에 폭우로 참사가 일어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의례적으로 보이는 지시를 한 게 전부다. 현장에 가지도 않았고, 중앙재해대책본부장인 행자부장관에게 업무를 맡겼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한다든지 하는 논평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굳이 현장에 가는 쇼를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수방대책을 철저히 세우라”는, 역시 의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지시를 하고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물론 이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난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정권이 다르다는 이유로 뭉갰던게 이명박이다. 졸렬한 정치고, 한심한 쓰레기 정치다.
당시 신림동 참사에 비해 대통령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야당도 대통령의 간결한 메시지에 굳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이게 전부다. 지금 상황과 너무 비교되지 않나?
지금 이 시대와 비교를 해보니 그래도 20년 전이 훨씬 품격있는 정치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 정치는 너무 천박해졌고, 저렴해졌고, 양아치들이 설치는 판이 되어버렸다. 관종들이 설쳐대는 정치, 지나치게 흥분하는 정치가 되었다. 이때다 싶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하는 쓰레기들이 도처에 출몰하고 있다. 나는 국힘당과 민주당 양당의 무조건 지지자들이 한국 정치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콩이면 대구에서도 콩이고, 부산에서도 콩이어야 한다. ‘지역주의 타파’는 ‘진영주의 타파’다. 지역이라는 진영 논리로 투표권을 행사하고, 정책에 대한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행태를 타파하자는 의미다. 그래서 노무현이 깨트리고자 했던 그 대상은 비단 지역주의만이 아니었다. 각자가 속한 진영에 따라 논리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행태에 대한 통렬한 외침이었다. 민주당에서 콩이면 국힘당에서도 콩이어야 한다. 이 간단한 논리가 이해가 안되는 인간들이 바로 한국 정치를 망친 진영주의자들이다. 아주 작게는 혈연, 학연이라는 진영에서 점점 그 범위가 확장되어 마침내 지역주의로, 당파성으로 논리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행태는 모두 타파 대상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실에서 “재해를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말입니다. 국민의힘 니들은 사실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거든요. 노무현 대통령 때 어떻게 했는지, 문재인 대통령 때 각종 재난을 어떻게 정쟁화하고 대통령을 물어뜯는 정략의 도구로 이용했는지 자신들의 과거부터 반성해야 하지 않나? 그 토대 위에서 메시지를 내야 하지 않나? 파렴치하고 뻔뻔한 놈들이다. 사실 나는 국민의힘 정치인들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발전시킬 통찰도, 역량도 안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대편의 민주당을 쳐다보면 더 큰 한숨이 나온다. 부도덕하고, 파렴치하고, 뻔뻔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수령 각하, 총통 각하 이재명을 결사보위하는 북조선 인민군 같은 민주당이 보인다. 히틀러의 유겐트들이 광장을 휘젓고 다니며 유대인을 향해 ‘벌레’라고 혐오하듯, 그리하여 끝내 집단수용소에서 벌레 죽이듯 아무렇지 않게 수 십 만명을 학살했듯이, 이재명을 반대하는 정치인과 시민을 향해 똥파리, 작전세력, 수박 타령하며 일베가 하는 짓을 능가하는 이재명 지지자들과 묻지마 민주당 지지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의 정치는 폐허로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정치 질서가 필요함을 강렬하게 느낀다.
묻지마 민주당 지지자, 묻지마 국힘당 지지자, 나라를 팔아먹어도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이런 쓰레기들로 인해 한국 정치는 철저하게 후퇴했다. 이 쓰레기들은 이재명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지지하지도 않는 정치인에게 한 표를 행사한 시민들의 고뇌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더 큰 파멸을 막기 위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 원리를 믿고 ‘소수 여당 대통령 vs 거대 야당’이라는 팽팽한 대립구도를 만들어 현상 유지라도 해볼려는 고뇌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 정당의 붇지마 지지자들은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양극화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병들었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삼고, 적을 향한 조롱과 혐오를 마치 정의의 구현이라도 하는 듯이 굴어대는 사이비 정의의 사도들이 설쳐대는 풍경은 마치 서북청년단과 빨치산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풍경이 연상된다. 공동체가 진중하게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삿대질하느라 바쁜 인간 군상들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김대중 시대의 정치가 그리워진다. 내가 죽도록 미워했던 그 시대의 한나라당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자 어떤가. ‘쓰레기’라는 표현이 말이다. 불특정 다수의 인간을 향해 쓰레기라고 표현하면 되나? 안되나? 당연히 안된다. 똥파리니, 수박이니 하는 멸칭에 문제의식이 없거나 그냥 침묵하며 지나치거나, 그런 멸칭을 쓰는 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심지어 친분을 쌓거나 하는 인간들을 향한 밈이었다. 기분이 어떤지 체험을 해보라는 차원에서…
내가 민주당 지지자들을 보며 절망감을 느낀 건(이재명의 기본소득에 대해 제대로 된 토론도 안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상이 교수를 징계하고, 수십년간 힘들게 차곡차곡 쌓아온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왔던 민주당에서, 별다른 이견없이 기본소득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리는 모습을 보며 완전히 절망하고 민주당에 대한 애정을 버렸지만), 인간을 혐오하게 만드는 똥파리, 수박, 작전세력이라는 멸칭과 매카시즘의 언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인간을 거의 못봤기 때문이다. SNS에서, 특히 유한계급이 살롱에 모여 고매한 철학을 논하듯 페이스북에 옹기종기 모여서 인맥관리나 하며 따봉 숫자 늘리느라 온갖 고매한 소리 늘어놓고, 차별금지법에 목소리 높이고, 드높은 인권의식을 뽐내느라 정신이 없는 인간들이, 눈앞에 벌어지는 인간 혐오에 대해, 그것도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무감각해질 정도가 되었는데도 문제제기 하는 인간을 못봤다. 내가 201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10주기를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을 닫아버린 이유다. 고매한 소리 늘어놓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보기 싫어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유대인들을 독일인들과 분리하기 위해 처음 시도한 작업이 ‘벌레’라는 멸칭을 확산시키는 작업이었다. 어느 순간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벌레 취급을 당했다. 벌레 취급의 강도가 심해지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집단 학살, 홀로코스트도 자행했다. 나쁜 마음을 먹어서 나쁜 인간이 되기도 하지만, 나쁜 짓을 눈감다가, 그러다 동참하기도 하면서 나쁜 놈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개별 인간은 선할 수 있지만 집단은 악마가 되기도 한다. 소설 <눈감은 자들의 도시>나 웹툰을 영화화한 <이끼>, <김복남 살인사건>도 그런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재명이 감옥에 가고, 모든 진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자기는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듯이 굴어대는 인간들을 우리는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똥파리니 수박이니 하는 멸칭과,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작전세력 운운하는 매카시즘에 침묵했던 고매한 진보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굴어대거나, 혹은 뻔뻔하게도 뒤늦게 비판 행렬에 끼어드는 행태를 보일지도 모른다. 그 역겨움이 벌써부터 밀려온다. 이재명 감옥 가는 날 떡 돌리겠다. 이명박 감옥 가는 날 떡 돌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