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은 1985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주도한 민추협을 근간으로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1987년 전두환의 내각제에 동의하는 듯한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양김이 탈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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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史)① 1955년 민주당 창당에서 1960년 신민당 분당까지
(민주당史)② 1963년 ‘야권단일화’ 패배에서 1985년 신민당 창당까지
이민우 구상, 양김의 신민당 탈당과 통일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져
이민우는 이미 1968년 5.3 인천사태를 불러일으키며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1986년 들어 직선제를 위한 개헌 국민운동을 시작했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을 결성했다. 5월3일은 인천 지부 결성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결성식이 열리기 전 4월 30일 이민우는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좌익 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면서 재야와 운동권을 자극했고, 재야와 운동권 4,000여 명은 5.3 인천대회장을 점거했다.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이날 대회는 무산되고 재야-운동권과 민추협-신민당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5.3인천사태로 경찰이 수배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권인숙양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일으키고, 신민당과 재야는 대정부투쟁을 함께 하며 연대전선을 회복했다.
10얼 28일에는 건국대에서 2,000 여명의 학생들이 ‘반외세 반독재 애국투쟁연합회’ 발족식을 갖고 자진해산할 무렵 전투경찰이 투입돼 강제연행을 시도했다. 결국 충돌이 생기고 1,525명의 학생들이 연행되고 1,288명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나는 이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서울대에 다니던 우리 1년 선배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듣기도 했다. 그 선생은 자기가 가르쳤던 그 선배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시대였다.
이 기사는 1986년 6월 7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제목에 ‘극렬 시위학생’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극렬’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악마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대 독재정권들과 그 하수인 노릇을 했던 언론들은 ‘극렬’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전두환 정권의 신민당과 학생들간 이간질 작전 ‘극렬’ 딱지 붙이기
‘극렬’이라는 표현은 일제시대부터 사용됐다. 그러나 그 사용 빈도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극렬’이라는 표현이 적극적으로, 자주 사용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늘 ‘극렬’이 따라 붙었다. 여기에 추가되는 수식어는 ‘좌경용공세력’이다. 합치면 ‘극렬좌경용공세력’이 된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학생들에게 불온한 딱지를 붙여 시민들과 분리시키는 공작 차원에서 했던 짓이었다.
특히 독재정권에 부역질을 하던 언론이 적극적으로 ‘극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극렬’은 곧 ‘빨갱이’와 등치됐다. 우리는 이걸 ‘매카시즘’이라고 말한다.
(극렬은 어디까지고 극렬이고 어디까지가 온건인가? 누구를 지지하든 그 형태는 다양하다. 태극기부대와 어버이연합 등 소위 우파 진영의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에서는 온갖 혐오의 단어가 넘실거리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처벌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 한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들을 향해 누가 한번이라고 극렬박빠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나? 극렬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집단으로는 1980년대 대학생들, 노무현 지지자, 이재명을 비판하는 문재인 지지자 말고는 없다. 얼마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박근혜 탄핵 시위 당시 경복궁의 전경차를 넘어가려던 사람들은 극렬인가? 아닌가? 이런 주관적이면서 불특정 다수인을 악마화하는 표현은 사라져야 한다. 대신 정책에 대한 입장에 따라 급진 개혁, 온건 개혁, 온건 보수, 수구 보수 등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극렬이라는 표현 자체가 매카시즘이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서 퇴출시켜야 할 범죄행위다.)
2018년 이후 민주당, 박정희-전두환의 계승자가 되다
더불어민주당에 이런 매카시즘이 횡행한 게 바로 2018년부터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극렬문빠’라는 멸칭이 붙었고, 파쇼 독재정권이나 사용하던 이런 멸칭이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정당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됐다. 그 선봉장에 선 인물이 이재명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이동형이다.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경험도, 민주화운동의 경험도, 제대로 된 정치철학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지식도 없는 정치자영업자인 이동형 따위의 파쇼적 행태에 민주당이 보조를 맞추며 당은 타락해갔다. 공신력있는 지상파에서는 마이크까지 쥐어줬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향해 ‘극렬문빠, 극문’이라는 멸칭을 붙이는 것도 모자라 ‘쓰레기 새끼들’ 운운하며 “다 죽여버릴라고”라는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독재자 박정희와 학살자 전두환조차도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죽여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막말이었다. 그런 이동형이 내뱉고 있는 수많은 엉터리 정보와 지식에 민주당 당원들이 뇌를 의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당이 김대중-노무현 정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정당으로 타락하는 건 필연이었다.
이동형의 “다 죽여버릴라고”라는 극단적인 발언은 사실 이재명이 선배이기도 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노무현조차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던 희대의 배신자 정동영 지지자 모임(정통) 회장이었던 이재명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잡탕 정당이 실시한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스떼기 시비가 붙었을 때 손학규 측의 정봉주를 향해 “다 죽여버려”라는 말을 내뱉은 바가 있다. 또한 이런 정봉주의 증언에도 뻔한 거짓말을 당당하게 하는 이재명의 버릇 역시 과거나 지금이나 다름 없음을 알 수 있다.
‘극렬문빠’라는 프레임은 위력적이었다. 문재인 정권을 싫어하는 보수언론은 원래부터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지지자들을 악마화하는 데 앞장섰다. 조중동 등은 이미 노무현 대통령 입기 동안에도 그 지지자들에게 ‘극렬노빠’라는 멸칭을 붙인 바 있었다. 이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이 노무현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기도 했다. 대북송금특검, 이라크 파병, 전교조 파업, 화물연대 파업, 지율스님 단식, 대연정, 한미FTA,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부안 방폐장 등 노무현이 민감한 현안에 있어 여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파를 할 때마다 지지자들은 떨어져나갔다. 그 상황에서도 노무현이 가는 길이 옳다고 지지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주홍글씨가 ‘극렬노빠’였다.
이 당시 노무현을 끝까지 믿어준 지지자들을 경멸했던 자들은 그 이후 노무현이 재평가를 받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이 아무렇지 않게 노무현 지지자 행세를 하고, 노무현을 팔아먹고 있다. 모두가 등 돌리는 상황에서도 노무현을 끝까지 믿고 지지해준 ‘극렬노빠’라는 주홍글씨가 붙었던 사람들을 향한 혐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오판을 한 자기들과 달리 끝까지 노무현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던 극렬노빠라는 사람들을 향한 증오와 질투심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노무현을 배신했던 기억은 지우고, 2002년 12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팔아먹고 있다. 현재까지 영화관에서 개봉된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영화는 2002년 12월까지의 이야기 밖에 없다. 2002년 12월 이후에는 노무현을 배신했던 역사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민주당 당 대표와 수석최고위원 등극을 눈앞에 둔 이재명과 정청래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광주학살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았던 전두환처럼, 지금까지 단 한번도 노무현을 배신했던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2022년 더불어민주당은 정동영의 계승자들이 민주당을 접수한 해로 역사에 기록될만 하다. 민주당 당원들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나꼼수 출신의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 주진우의 공통점은 노무현의 정치를 폄하하며 정동영을 추켜세웠다는 점에 있다. 또한 민주당 당권을 장악하기 직전에 있는 이재명과 정청래는 정동영의 좌우 호위무사 출신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가히 ‘정동영 키즈의 전성 시대’로 기록할만하고, 노무현의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따로 쓰겠다.)
이처럼 불특정 시민이나 학생들을 악마화하는 수법은 보통 독재정권이 자행한 정치 공작의 일환이었다. 학생들에게 불온한 딱지를 붙여 시민들이 동조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조중동 같은 언론들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그 지지자들에게 불온한 사람들 혹은 과격한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사용한 언어가 바로 ‘극렬’이었다. 그런 행태가 민주당 내부에서 벌어진 게 바로 2018년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상황이다. 민주당을 파쇼정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해찬 체제 등장 이후 일반 시민들을 악마화하는 행태는 군사독재정권보다 더 극심해졌고, 민주당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파쇼의 길로 달려갔다. 추미애, 이해찬, 송영길 등 당 지도부 인사들마저 불특정 시민들을 혐오하는 자들의 행위에 힘을 실어주고, 시민들 혐오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이에 민주당은 다양한 의견 제시가 불가능한 파쇼 정당이 되었다. 당이 파쇼화되면서 그 수혜는 고스란히 이재명에게 돌아갔다.
이재명에 대한 비판은 징계를 받지만, 이재명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온갖 멸칭으로 조롱당해도 아무런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재명이 추진하는 기본소득이라는 근본없는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수준이었다. 민주당 게시판에서는 이낙연을 “죽여버리겠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아도 아무런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재명 비판은 징계를 받아도, 일베가 광주 시민들을 혐오하고 조롱하기 위해 만든 ‘수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이런 행태를 방치하고, 나아가 민주당이 파쇼 정당, 일베 정당이 되면서 이재명 지지자들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선거 유세중 송영길의 뒷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인물도 이재명의 열혈(극렬이라고 쓰지 않고 열혈로 써야 중립적인 표현이다.) 지지자였다. 2018년 이후 4년 간 민주당은 그렇게 완벽한 파쇼 정당, 일베 정당이 되었다.
(송영길의 뒷통수를 망치로 가격한 이 사람은 열혈 이재명을 지지자로, 송영길이 종전 선언에 미적거렸다는 이유로 송영길의 뒷통수를 망치로 내리쳤다. 황교익은 사건이 터지자 곧장 평소의 편견을 바탕으로 국민의힘 지자자 소행으로 몰아가는 글을 올렸다가이이재명 지지자로 밝혀지자 슬그머니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다. 물론 이재명 지지자라는 사실은 감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재명은 아주 손쉽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2022년 8월에는 역대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당 대표에 등극한다. 이재명이 민주당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은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자가 되는 과정과 거의 똑같다.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지지자로 동원하고, 이들의 숫자를 불려나가서 다수결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수법이 똑같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80세에 가까운 나이에 판단력이 흐려져 히틀러를 수상 자리에 앉혀 권력을 장악하는 데 길을 터준 것처럼, 과거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기여했던 이해찬이 인생 막판에 판단력이 흐려져 이재명을 ‘민주당의 소중한 자산’이라 명명하며 민주당에서 퇴출시킬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이재명의 권력 쟁취에 후원자를 자처하는 지경으로 추락한 것은 힌덴부르크와 판박이었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힌덴부르크와 이해찬은 그렇게 독재자 히틀러와 이재명을 탄생시켰다.
(지금 당대에는 나의 이런 객관적 평가가 이해 안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 유통 속도가 빠른 오늘날에는 10년 안에 나의 이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은 객관적 역사 서술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런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기록을 정리하는 중이다.)
‘반이재명 성향의 문재인 지지자 타도’로 뭉친 조중동과 이재명 지지자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문재인 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지지자들에게 불온한 딱지를 붙이려는 국힘당과 조중동의 이해관계와, 이재명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나아가 민주당 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이재명 지지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두 세력은 외형적으로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적대적 대립 관계이지만, 내적으로는 ‘반이재명 성향의 문재인 지지자 타도’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물론 국힘당과 조중동은 ‘문재인 지지자’라는 더 넓는 공격 목표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반이재명 문재인 지지자’는 공통 분모였다.
이동형이 이재명을 반대하는 민주당 당원과 시민들에게 ‘똥파리’라는 멸칭을 붙인 이후 민주당 내에서는 아무런 꺼리낌없이, 심지어 정치인들조차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고, 차별금지법 제정이니 온갖 인권감수성을 뽑내는 자타칭 지식인이라고 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런 야만적인 행태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베식 혐오 문화에는 눈감고 침묵하면서 이준석을 향해서는 자신들의 정의감과 인권감수성을 뽐내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2018년 이후 민주당에서 벌어진 풍경은 일찍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능가하는 풍경이었고, 전두환 정권이 자행했던 운동권 학생에 대한 악마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 처음 시작한 일은 유대인을 ‘벌레’라고 부르도록 선전선동했다. 괴벨스는 유대인을 ‘벌레’라고 부르도록 유도했고, 시간이 갈수록 주저하던 독알안들도 점차 유대인들을 ‘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조치는 유대인들의 가게를 습격하는 일이었고, 곳곳에서 상점을 약탈하는 행위가 벌어졌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은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고, 미처 떠나지 못한 우대인들은 그야말로 벌레 취급을 당하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집단 학살을 당했다. 이게 바로 2018년 이후 현재까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했던 역사를 가진 민주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똥파리'에서 시작된 혐오의 문화는 김어준의 ’작전세력', 즉 이재명을 비판하는 당원이나 문재인 지지자는 실제로는 민주당을 파괴하기 위해 위장 입당한 사람이며, 위장 문재인 지지자라는 음모론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재명 비판은 곧 민주당을 파괴하기 위한 공작이라는 음모론으로 이어졌고, 그 배후에 삼성그룹이 있어서 자금을 지원한다는 음모론으로 확장됐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삼성그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황당한 루머가 돌기도했고, 그 루머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노무현을 팔아먹고 장사를 하는 ‘바보주막’이라는 술집이었다.
‘똥파리’에서 ‘작전세력’으로, 그리고 2021년에는 2012년 총선을 말아먹은 막말의 대가 김용민에 의해서 ‘수박’이라는 일베식 혐오 표현으로 이어진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수박은 1950년대에 잠깐 사용된 표현으로 ‘겉은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속은 빨갱이’이라는 의미의 매카시즘 언어였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수박’이라는 표현이 일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호남인들을 비하하기 위해 무등산 수박에서 차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무려 60~70년 전에 잠깐 사용되다 말았던 매카시즘을 변명으로 내놓은 셈이다. 즉 자기들 스스로 매카시즘이라는 걸 자인한 것이다.
김대중-김영삼, 전두환 정권의 분열 작전 무산시키고
‘극렬좌경용공 빨갱이 학생’들과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서다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으로 ‘극렬문빠’라는 멸칭은 더 이상 효력이 없어졌다. 국민의힘과 조중동 입장에서는 더 이상 써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퇴장과 함께 그 지지자도 퇴장했기 때문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민주당의 미래 권력자의 지지자가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개딸’이다. 이재명 비판 세력을 향해 ‘극렬문빠’라고 멸칭했던 사람들이 이제 ‘극렬개딸’로 등극해 조중동의 타깃이 되었다.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개딸’에게 불온한 딱지를 붙이는, 이동형이나 김어준, 김용민 등이 자행했던 야만적인 행위가 개딸을 향하면 적극적으로 개딸을 변호해 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민주당 내에서 개딸을 비판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임을 밝혀둔다.
(그나저나 극렬노빠, 광노빠, 유시민빠 소리를 듣던 자들이 똥파리, 작전세력, 수박 같은 일베식 혐오에 눈감거나 동참하는 행태는 비극적인 일이었다. 자신들이 당했던 혐오를 방관하거나 동참하는 행태는 ‘벌레’ 취급당하던 유대인이 유대인 집단학살에 가담하는 행태와 똑같았다. 유시민의 지성이 타락한 수준만큼 그 주종자들의 지성도 함께 타락하면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재명을 비판하는 당원과 시민들에게 똥파리, 작전세력, 수박 운운하던 정봉주는 ‘강성 지지층’이라는 중립적 표현조차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행태를 어처구니 없다고 표현한다. 정봉주가 말하는 ‘수박’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참여한 손학규가 대표적이다. 정봉주는 수박 손학규(정봉주 기준)의 꼬붕이었다. 그런 정봉주가 수박 타령을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아무렇게나 개쌍욕을 하는 정봉주가 버젓이 지상파에서 패널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한국 사회의 타락상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권 하에서 MBC, KBS, YTN 가리지 않고 불특정 시민들을 꺼리낌없이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준 것은 정권교체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방송사 PD들의 지적 수준 역시 얼마나 처참한 수준으로 타락했는지를 증명한 사례로 기록할 수 있겠다.
어떻든 2018년 이후의 더불어민주당은 지지자들을 와해시키기 위한 이간질에 넘어가 스스로 일베식 혐오 문화에 편승해 파쇼 정당, 일베 정당이 되었다. 반면 1986년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민당은 전두환 정권의 공작에 넘어가지 않고 ‘극렬좌경용공세력’이라는 불온한 딱지가 붙은 학생들과 연대해서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전두환의 이간질에 넘어간 이민우가 불을 질렀다. 1986년 1월 새해 벽두에 전두환은 연두국정연설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민추협과 신민당이 전국에 개헌운동본부를 만들면서 민심이 악화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4월 30일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와 영수회담을 가졌고, 여기서 이민우는 “좌익 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했다. 이 당시 전두환은 "여야 합의를 전제로 개헌을 할 용의가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표명했고, 국회에서는 헌법개정특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6년 4월 당시 신민당은 당론으로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는데 이민우는 6월 1일 전두환과 영수회담을 한데 이어 6월21일 민정당 대표인 노태우와 회담을 가진 뒤 6월 30일에 내각제에 동의하는 이민우 구상을 내놓게 된다.
이후 10월에 일어난 건국대 사태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에게 ‘공산혁명분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용공분자가 개입해 체제 전복을 노린다’는 음모론을 퍼트렸다. 김어준이 이재명 비판 세력을 향해 “문재인 지지자로 위장해 민주당을 파괴하려는 작전세력”이라고 음모론을 펼친 것과 동일한 구조다. 김어준이 전두환 정권 시절에 성인이었다면 식은 죽 먹기식으로 간첩사건을 조작해낼 수 있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건국대 사태로 구속된 학생들에게 ‘공산혁명분자가 개입해 체제전복을 노리는 세력’이라는 ‘빨갱이’ 딱지를 붙이면서 오히려 양김과 이민우의 분열은 가속화됐다. 양김은 학생듥과 연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의 빨갱이 딱지 붙이기에 동조한 상황이었다. 2018년 이후 민주당에서 이재명을 비판하는 당원과 그 지지자들을 ‘똥파리’라 멸칭하는 행렬에 동참한 이해찬, 추미해, 송영길은 이민우의 길을 걸어간 셈이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전두환 정권의 이간질과 분열책동에 놀아나지 않는 통찰력과 리더십이 있었다.
결국 양김의 영향력이 작동하던 신민당은 다시 한번 직선제 개헌을 천명했다. 리더십을 상실한 이민우는 총재직에서 사퇴하고 고향인 충남 온양으로 내려가버렸다. 당내 분열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신당을 창당하기로 한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민당 탈당과 통일민주당 창당
이어진 김대중의 탈당과 평화민주당 창당
신당 창당 움직임이 있던 중 1987년 1월 14일에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민추협이 중심 세력으로 나섰다. 2월 7일 민추협 등 48개 단체가 국민추도회를 개최했다. 정부는 3만 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압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월 12일 총 90명의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중 74명이 탈당했고, 신민당은 졸지에 교섭단체 지위도 상실해버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직선제 개헌 투쟁을 중심축으로 대정부 투쟁에 나섰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개헌은 없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날은 통일민주당이 창당발기인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창당준비위원장이었던 김영삼은 강력한 투쟁 의지를 천명했고, 5월 27일 민추협과 통일민주당, 재야, 학생들이 연합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대여 투쟁에 나서 6.10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의식불명에 빠졌고 6.10 국민대회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하게 된다.
1971년 4월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한 이후 16년 만에 직선제를 되찾았다. 이제 문제는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되느냐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열했다. 각자 나름대로 할 말은 있다. 분란의 씨앗은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 이후 만들어졌다.
-김대중 :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을 수락할 경우 사면복권이 되어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
-김영삼 : “김 의장에게 ‘사면복권이 되면 당신을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김 의장과 똑같이 민주화만 된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1986년 10월에 두 사람이 잇따라 대의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이후 1987년 4월에 전두환의 호헌 조치가 있었고, 6.10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이 나왔다. 이어 7월 8일 김대중은 사면복권되어 8월 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한다.
이후 누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하느냐는 논쟁이 생겼다. 김대중은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로 자신의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불출마 선언은 효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자신이 사면복권 되면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던 김영삼의 선언이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김영삼은 4.13 호헌조치로 김대중의 선언이 무효화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했기 때문에 김대중의 선언은 유효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10월 10일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 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이 당시 평화민주당의 창당 발기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수구주의와 급진적 개혁주의의 양극을 배제, 온건한 개혁노선을 표방해 중산층과 근로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정당을 지향한다.”
그리고 김대중은 인사말에서 당의 진로에 대해 3대 원칙과 5대 공약을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3대 원칙 : 민족민주 정통성 확립, 온건개혁주의 정립, 중산층과 근로계층의 이익 대변
-5대 공약 : 국민화해, 정의경제, 군부중립, 자주외교, 통일추진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을 보라. 어디에 김대중 정신이 있나? 온건개혁주의를 수박이라고 멸칭하고,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이 검수완박 밀어부쳐 개혁 후유증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급진적 개혁주의를 배제한다는 그 원칙은 지금의 민주당에서 멸절당했다. 이재명을 비판했다고 똥파리, 작전세력, 수박이라고 멸칭하는 일베 정당, 파쇼 정당이 된 지금의 민주당에 국민화해, 금진적 개혁주의 배제라는 온건 개혁노선이 어디에 있고, 국민화해 정신은 어디에 있나?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02년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해 내쫒은 바 있는 패륜 정당이다. 2007년에는 노무현도 내쫒은 패륜 정당의 피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정당이다. 이런 정당이 감히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제 갓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끝까지 양김 단일화를 촉구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의 절망감은 형언하기 힘들다. 가장 막내였던 나는 이 시대를 살면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모든 선배들의 그 절망감을 조금은 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는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모두의 입장을 이해한다. 어디에 서있냐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를 수 있다.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는 식으로, 선악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대의명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화에 실패한 역사적 책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훗날 회고록에서 자신이 양보를 해서라도 정권 교체라는 대의를 관철해야 했다고 술회했다.
이 때의 패배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명제가 참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참이 아니다. 이 명제는 ‘진보가 힘을 합쳐야 이간다’는 명제가 성립돼야 참이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이래 모든 선거 결과를 보면 ‘진보가 힘을 합쳐야 이긴다’는 명제가 성립된 선거는 2010년 지방선거가 유일하다. 2010년 선거 말고는 소위 자칭 진보들이 분열하지 않고 하나로 뭉쳐서 이긴 선거는 없다. 2010년 6월 10일 지방선거는 그 직전인 5월 23일에 노무현 서거 1주기였다는 점과, 당시 광역단체장에 출마한 후보들이 강원 이광재, 충남 안희정, 경남 김두관 등 노무현과 연관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몇몇 지역 단위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간에 후보단일화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보단일화가 된 것도 아니다. 서울에는 한명숙과 노회찬이 동시에 출마해서 오세훈이 이겼고, 경기도는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이 민주당의 김진표를 이기고 본선에 나가고 후보단일화를 위해 심상정이 후보 사퇴를 했지만 김문수한테 패배했다.
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사례는 자칭 진보진영이 뭉쳤을 때가 아니라,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를 소구했을 때 이겼다. 오히려 ‘진보는 분열해야 이긴다’가 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