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후폭풍이 일파만파입니다. 이번 사건은 범죄자들의 성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허술하게 만들어진 국회의 입법과 검경의 적극성·전문성 결여, 법원의 기계적인 영장심사가 조합된 구조적 문제의 산물로 보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 '피의자 인권'에서 '피해자 인권' 보호로 전환된 형사정책적 시류에 반하는 단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검경과 정부 관계부처, 서울시, 서울교통공사까지 뒷북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피의자 감시'가 아닌 '피해자 감시'라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는 별론으로 하고...
이번 사건에 반응하는 일부 사회적 움직임 중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여성혐오 범죄라는 주장입니다.
언론보도를 추적해보면, 사건 발생 다음날인 지난 15일신당역 추모 공간에는 한 시민의 이런 글이 붙습니다.
15일 오후 20대 여성 역무원 살인사건이 벌어진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앞에 추모의 꽃과 혐오 범죄
중단을 촉구하는 글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음날인 16일에는 진보당이 신당역 앞에서 '불법촬영·스토킹·여성혐오범죄 강력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범죄로 공식화 합니다. 이들은 2016년 일어난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을 언급하면서 신당역 사건 역시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지적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제도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여성을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 객체로 여기는 여성혐오가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면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6년이 지났다. 6년 동안 우리가 배우고 변화한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이날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신당역을 방문합니다. 여기에서 한 기자가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김 장관은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이중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음날인 17일 불꽃페미액션이라는 단체는 "일터에서 불법 촬영과 스토킹 범죄에 노출된 여성 노동자가 업무 중 살해당한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면 무엇이냐"며 "국가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재발 방지 조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에서 열린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추모제’에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한겨레신문 이주빈 기자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도 "명백한 여성 혐오 사건인데도 국가는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여성가족부 장관, 검찰과 경찰, 고용주인 서울교통공사가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을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진보당·녹색당·전국여성연대 등은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알고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밝힌 김 장관을 저격합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는 "'혐오범죄'란 '개인에 대한 증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속한 그룹에 대한 적대감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로 정의된다"며 "이번 피해자는 우연적으로 선별된 것이 아니고 가해자가 적대감을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진보당과 녹색당, 전국여성연대,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당역 살인사건 관련 김현숙 여성가족부장관의 발언을 두고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같은 날 김 장관에 대한 사퇴 요구가 보도되자 조민경 여가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학계에서도 논의하는 상황인 것 같고, 논의를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합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범죄라고 하는 일각의 주장에 애매한 입장을 보인 것이지요. 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제스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지를 남기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란에 여당이 또 참전합니다.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20일 자신의 페이스북 글을 통해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고 발언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일각의 사퇴 요구와 관련해서 "비극을 남녀갈등의 소재로 동원하는 것은 지극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소환합니다.
권 의원은 "만약 여러분이 신당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고 믿는다면 그 비난은 여가부가 아닌 민주당을 향해야 마땅하다"며 "변호사 시절 이재명 대표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변호했다"고 화살을 돌립니다. 그는 "당시 이재명 변호사는 피고인이 심신미약이었다고 변호했고, 지난 대선 때는 '데이트 폭력 사건'으로 규정하며 애써 파장을 축소했다"며 "민주당은 바로 이런 사람을 압도적 지지를 보내 당 대표로 선출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N번방 사건을 엄정하게 처리했다"며 "당시 '디지털 성범죄'의 판례도 제대로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최고형량을 이끌어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고 추켜세웠습니다.
권 의원은 "신당역 살인사건 같은 비극이 정치적으로 오독돼서는 안 된다. 당파적으로 오조준돼서도 안 된다"고 자기모순적 발언을 덧붙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여성혐오 범죄 논란이 확산되어 온 궤적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은 여성혐오 범죄일까요?
사회학자 앨런 G. 존슨(Allan G. Johnson)은 “여성혐오란 여성을 여성이란 이유로 혐오하는 문화적 태도”라고 정의하면서 "성적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중심이자,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억압의 중요한 기초"라고 설명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정의와 주장이 있습니다만, 지금부터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한 <인권교육기본용어집>을 통해 여성혐오와 혐오범죄의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국가인권위는 '여성혐오'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여성혐오는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어로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거나 여성을 열등하거나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 여성을 타자화하거나 여성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 여성에게만 특정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 등을 뜻한다."
혐오범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혐오범죄는 일종의 메시지 범죄로서 표적이 된 집단 구성원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성애자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동기가 되어 폭행을 가했다면, 폭행을 당한 동성애자 개인도 큰 상처를 입지만 동성애 집단 전체에 대해 이렇게 차별과 폭력이 가해질 수 있음을 알리며 위협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에 다른 범죄에 비해 특별한 해악이 있다."
국가인권위의 <인권교육기본용어집>은 '여성혐오 범죄'만을 독립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습니만, '현대사회에서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여러 유형 중 하나'라고 짚고 있습니다.
즉, 여성혐오 범죄란 소박하게는 '여성을 남성의 부속적 지위로만 보는 지극한 남성중심주의자가 여성 전체를 위협하기 위해 저지르는 범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범행의 경중이야 어떻든 범행의 동기나 목적은 이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전주환은 이와는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우선 2년간 피해자만을 집요하게 노렸습니다. 수사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경찰 단계에서는 전주환이 여성혐오적 행동을 보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전주환이 범행 전 피해자를 닮은 여성을 뒤쫓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일었지만, 그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였다면 (전주환이)그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여성혐오 범죄의 예로 자주 인용되는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도 실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의 특징을 보이기는 하지만 범행동기와 배경은 김성민의 조현병이었습니다. 조현병에 의한 살인은 범죄분류상 '묻지마 범죄'로 분류됩니다. 이는 프로파일러 5명이 투입된 경찰의 프로파일링과 검찰수사, 전문의 감정이 추가된 대법원 판단까지 유지가 됩니다.
일부 단체가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왜 여성혐오 범죄로 몰고 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표현의 자유' 영역의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왜곡·조작되고, 사회여론을 분열시키고, 이에 편승한 정치권의 무기가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범죄입니다.
우리 앞에는 '스토킹 범죄'라고 하는 거대한 숙제가 있습니다. 지난 22년간 어찌어찌 외면하고 미뤄왔지만 지금 이 숙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뿌리부터 들어내는 근본적인 접근과 채망처럼 촘촘한 사회안전망 마련을 위해 우리 모두 전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14일 서울교통공사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18일 오전 한 시민이 추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