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렵다. 관념적이다. 우리의 삶과 별로 관계없는 식자들의 아는체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실생활에서 무슨 소용인가?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이렇다. 한 마디로 말하면 철학은 우리의 삶과 별로 관계 없는 관념의 언어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이런 생각이 확장되면 인류가 쌓아올린 지식을 무시하게 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tualism)로 연결된다. 김어준의 ‘무학의 통찰’이라든지, 약을 안쓰고 아이를 키운다는 ‘안아키’ 같은 미신이 득세한다.
오늘은 휴일용으로 철학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열심히 책을 읽고, 자료 정리하고, 메모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쌓은 정도에 불과하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고, 정치 철학과 사상에 관심을 가진 ‘덕후’ 정도로 이해해주면 감사하겠다.
인류가 쌓아올린 지혜를 사랑하자
두산백과사전은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필로소피(philosophy)란 말은 원래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하며,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며, 필로소피아는 지(知)를 사랑하는 것, 즉 '애지(愛知)의 학문'을 말한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BC 399)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학맥은 플라톤(B.C 428-348),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로 이어진다. 참고로 같은 시기 동양에서는 공자(B.C 551-479)와 맹자(B.C 372-289)가 활동하는 춘추전국시대였다.
과거는 그냥 지나간 옛날이 아니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는 “과거는 절대 죽지 않는다.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H.Carr, 1892-1982)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규정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기록인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현재를 알기 위한 것이고, 현재를 제대로 파악해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철학의 역사를 대충 훓어보면 <고대>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로 마케아벨리를 거쳐 <근대>의 토머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에드먼드 버크, 토머스 페인, 제임스 메디슨, 알렉시스 드 토크빌, 존 스튜어트 밀,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헤겔,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지나 <현대>의 존 롤스, 마이클 샌덜, 마사 누스바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은 각각의 삶을 살았지만 역사 속에서 하나의 줄기로 이어진다.(동양은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이후 다양한 사조의 철학이 죽어버렸다.)
나열한 철학자들이 할 일이 없어서 관념적으로 보이는 언어를 사용하며 세상을 탐구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사실 관념적이지도 않다. 철학자들의 말과 글에는 구체적인 삶이 녹아 있다. 보편화를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개념어가 만들어지고, 관념적인 걸로 보일 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각자가 처한 시대 환경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고민했을 테고, 그 결과물이 지식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철학자들을 오늘날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종종 붙이곤 하지만 사실 그들도 때로는 누추하고, 또 때로는 비루한 보통의 인간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자신이 발딛고 선 현실의 제약 속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철학은 각자가 발딛고 선 현실에서 더 나은 미래를 찾아가는 탐색 과정이다. 그 과정들이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사를 “세대와 세대의 이어달리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윌리엄 포크너, E.H.카, 노무현 모두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동일하다.
철학은 말장난도, 관념의 언어도, 언어의 유희도 아니다. 철학이 생겨난 이후 질문은 늘 같았다. 모든 정치 철학의 도착 지점은 동일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권력을 어떻게 나누어야 정의로운가?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정의로운가?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정의로운가?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연대해야 정의로운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덜 교수에 의해 더욱 유명해진 이 질문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철학을 관통하는 공통 질문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모든 갈등은 불의, 부조리, 부당, 불공정, 불공평 등의 문제로부터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철학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결부된 문제를 하나 하나 풀어간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굳이 이렇게 어줍잖게 철학을 말하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 정치에 철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를 ‘생활정치’라는 이름의 ‘포퓰리즘’, 더 정확하게는 ‘이익정치’가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치의 투쟁’이 사라지고 ‘이익의 투쟁’이 펼쳐지고 있다. ‘정의’는 그냥 허공에 뜬 관념의 언어가 아니다. ‘가치 논쟁’은 할 일 없어서 하는 말장난이 아니다. 인간은 가치의 투쟁을 통해 공정한 이익 분배의 길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치 투쟁은 사라지고 이익 투쟁만 남았다. 여기저기 이익집단이 발호하고, 이익 집단이 가진 투표 용지 숫자가 결정 권한을 갖고, 머리 숫자가 많은 이익 집단이 더 많은 예산을 가져가는 저급한 정치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생활 정치’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것이 정의로운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머리 숫자가 작은 집단은 자원 배분에서 밀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런 정치가 정의로운 정치냐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정의에 목말라한다.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소위 ‘검수완박’도 정의의 문제다. 국가 권력을 어떻게 배분해야 인권 신장에 도웅이 되는지, 더 정의로운지를 놓고 벌이는 투쟁이다. 가치 투쟁 속에는 이익 투쟁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대놓고 이익을 놓고 벌이는 투쟁보다는 적어도 가치를 놓고 벌이는 투쟁이 정의를 찾아가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된다. 이 때 누군가 이익을 획득한다면 이는 이익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가치 투쟁이 낳은 산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이 공정하고 불공정한가?
무엇이 공평하고 불공평한가?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가?
이 질문은 부의 분배에도, 권력의 분배에도 공통된 질문이다. 이 세상 모든 갈등은 ‘권력과 부의 분배’를 두고 생겨났다. 그런데 왜 아무도 정치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지? 왜 정치 철학을 공부하는 정치인은 없지? 마이클 샌덜의 강연에 환호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
그러나 이 모든 논의를 멈췄다. ‘거대 담론’ 운운하고, ‘탈이념’ 운운하며 진지한 모색과 숙고는 사라지고, 바다 표면을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들끓는 여론에 아부하는 정치가 ‘생활정치’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창궐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투쟁에 함몰되어 가치투쟁이 실종됐다.
오늘 글에서는 정치 철학이 탄생하는 과정, 알고 보면 위대한 철학자들도 시대의 한계 속에서, 어쩌면 비루해보이는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일단 마키아벨리부터 시작해본다.
외세에 휘둘리는 조국의 부활을 꿈꾼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마키아벨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대표적인 정치 철학자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갈등’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 정치철학자이다. 400년 후에 미국의 샤츠 슈나이더가 좀더 정교하게 갈등의 정치학을 이론으로 정립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갈등’을 정치의 긍정적 요소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정치를 신학에서 분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런 측면에서 모든 갈등을 은폐하고, 내부 비판을 내부 총질로 악마화한 민주당의 원팀론은 500년이라는 시간을 역행한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이자 반동적인 파쇼 논리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대단한 정치 철학도 그저 자신이 처한 삶속에서 나온 결과물일 뿐이다. 당시 마키아벨리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궁리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도시 국가인 이탈리아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의 간섭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신세였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조국을 과거 화려했던 로마 제국처럼 부흥하는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로마 공화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마키아벨리를 전공한 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마치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듯이 서술하는 경우도 있고,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를 주장한 이유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애국심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시민들에게 일정한 자유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고, 귀족 중심의 체제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이 애국심을 갖게끔 유인책이 필요했고, 그 방법을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찾았다.
당장 마키아벨리는 1494년에 조국인 피렌체공화국이 프랑스의 샤를 8세(1470-1498)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면서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는 역사를 목격하기도 했다. 인근 피사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체 군대가 없어서 용병을 고용해서 전투를 했고, 진압에 실패하는 것도 목격했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마키아벨리의 노력으로 1506년에 민병대가 조직되고, 1509년에 피사를 수복한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로마 제국을 건설한 고대 로마 공화정의 막강한 군사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시민들에게 일정한 자유를 주되 공공성을 강조한다.
뭐 이건 내 주관적 평론이니 마키아벨리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마키아벨리 전공자들이야 근대와 현대 민주주의에 마키아벨리를 접목시키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적당히 올려쳐야 납득이 갈텐데 너무 억지스러운 주장이 많다. 솔직히 그렇게 따지면 마키아벨리의 꿈을 이룬 사람이 무솔리니 아닌가 싶다. 해외 식민지도 개척하면서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시민의 자유권이나 민주주의 이론으로까지 확장하는 건 정말 무리수가 아닌가 한다.
(공화주의는 삐걱하면 전체주의로 흐를 수도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 기풍이 강한 미국의 경우 우파 이론가인 마이클 센댈의 공동체주의도 경계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당이 자행한 악업 때문이고 이후 스탈린의 헤겔 좌파 전체주의, 히틀러의 헤겔 우파 전체주의가 악업도 한 몫 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이론가도 등장하는 것이고… 현대 공화주의는 고대 공화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이건 따로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갖고 한번 쓰겠다.)
마키아벨리 사후에 홉스나 로크, 몽테스키외, 루소 등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면서 3권 분립이 나오고 주권론이 등장했지만 마키아벨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학자도 없다. 이들이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이론을 제시한 게 1600년대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 200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500년을 뛰어넘어서 오늘날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에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갖다 비빈다고? 전공자들의 마키아벨리 사랑은 알겠다만 적당히 좀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마키아벨리를 그럴싸하게 울궈먹는 행태도 심각한 문제이긴 하다. 알게 모르게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본다.
어떻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탈리아의 부국강병책이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결과를 내면 된다는 결과지상주의로 갈 수밖에 없고, 잔인한 정치는 당연히 용납이 되고, 시민들도 철저히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바라보고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히틀러, 무솔리니, 박정희, 김일성 식의 공화주의와 훨씬 가깝다. 고대 로마 공화정도 병영 국가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주목받게 된 것은 유럽에 대규모 전쟁이 무수히 펼쳐지면서 각종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부터다. 도덕주의적 이상론의 허약함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외교 분야에서 특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많은 영감을 주었다.
당시 이탈리아가 처한 상황을 놓고 보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상당히 타당성을 갖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왕권을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면서 부국강병으로 가는데 이탈리아만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조국을 사랑하는 마키아벨리 입장에서는 한심해 보였을 것 같다. 당시 프랑스는 1469년에 루이 11세가 절대왕정을 수립했고, 영국은 헨리 8세(1491-1547)가 등장해서 자신의 이혼을 반대하는 로마 교황과 맞서 싸우며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만들며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며 강자로 부상했다. 여기에 북쪽 국경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이 있었다.(Sideways가 쓴 독일 드레스덴(1), 작센의 중심에서 종교개혁을 보다는 글은 바로 이 시기에 관한 글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마키아벨리가 죽었던 해인 1527년에 로마를 침공해서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이 때의 전쟁이 ‘코냑연맹전쟁’인데 오늘날 프랑스어를 표준화한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고 있던 스페인의 카를 5세(1500-1558)와 맞서 싸운 전쟁이다.
스페인은 카를 5세가 즉위하기에 앞서 15세기말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통합되면서 신흥 강자로 떠오르며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왕국을 지배했다. 페르난도 2세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카를 5세로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대제’(영국에는 알프레드 대제,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대제, 프랑스는 샤를마뉴 대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가 있는데 각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왕이어서 각 나라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대제라는 칭호가 붙었다.)라고 불리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투표로 선출했는데 카를 5세가 초반 열세를 뒤집고 프랑수아 1세를 물리치고 황제로 선출됐다.(이 때도 금권선거가 장난 아니었음) 그래서 열받은 프랑수아 1세가 코냑연맹을 구성해서 ㅎ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나폴리왕국을 접수하러 갔다가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한테 박살난 전쟁이다.
스페인이 만든 사극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가 2021년에 국내에서도 방송되어서 KT에서 시청할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 중앙집권체제의 국가가 형성되는 16세기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해 스페인을 강국으로 키워낸 영웅호걸 이사벨 1세를 주인공으로 만든 드라마는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다.
마키아벨리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의 후예들이 도시 국가로 흩어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으니 열불이 날만하다. 더구나 당시 피렌체는 그 유명한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일으키고 있었다. 인문학과 예술이 그야말로 부흥했다. 마키아벨리는 인문학에 열광하고 예술에 심취하는 약해 빠진 사조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국방을 용병에 의존하고 있는 나약한 피렌체를 강한 나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재취업을 하기 위해 쓴 책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를 주도한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 가문과는 악연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이 샤를 8세에 의해 축출되고 피렌체가 교황 영향권에 들어간 후 외교 분야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 입장에서는 부역자인 셈이다. 그런데 1512년에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접수하면서 마키아벨리가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겨우 목숨은 부지해서 시골로 내려가 쓴 책이 군주론이다. 이 책은 재취업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들고 메디치 가문을 찾아갔지만 성벽 관리를 하는 하급 관리로 채용되는 데 그쳤다. 훗날 메디치 가문이 다시 축출되고 공화국이 재건됐지만 메디치 가문의 부역자로 찍혀서 성공하지 못했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시골에서 쓸쓸하게 살다가 죽었다.
(잠깐 옆길… ‘메디치’라는 출판사에서 ‘피렌체의 식탁’이라는 매체를 운영하면서 ‘마키아벨리의 편지’라는 것도 운영하고 있는데, 마키아벨리와 메디치 가문의 악연,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인문 부흥의 피렌체공화국의 분위기를 싫어했던 마키아벨리를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조합이다. 그냥 유명하고 좋아 보이는 거 다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철학은 당대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철학은 과거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해법을 찾아 미래 설계도를 그렸듯이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함께 굴러간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서 21세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무리수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마치 대단한 불변의 이론처럼 떠받들면 현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부합하는 모델은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다.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이 다 그렇다.
오늘 글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내용에 대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오늘날에 대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를 평하면서 무슨 2000년전 전제군주제의 삼국지 시대를 끌고와서 제갈량 흉내 내는 행태도 우습고, 온라인 게임 하듯이 평론하는 숱한 유튜버와 팟캐스트가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태는 정치의 저질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더구나 군주론을 제대로 다 읽은 것 같지도 않은 티가 역력한데 고작 몇 토막의 문구를 끌고 와서 오늘날 정치에 대입하는 행태는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키아벨리의 차악 선택론도 오남용도 심각하고, 정당한 절차를 중요시하는 현대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인 결과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마키아벨리가 널리 인용되는 세태도 문제다.(결과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는 막스 베버의 책임윤리도 널리 악용되고 있다. 이 부분은 유시민이 퍼트린 해악이다.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의 논리구조가 결과지상주의인데 오늘날에는 소위 민주화 투쟁을 하고 민주주의를 떠들던 자들이 결과지상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민주당 진영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 오남용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에 헌사를 바치는 글에 마키아벨리가 많이 등장하는 데, 이는 이재명식 반민주적인 독단적 행정을 미화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홉스와 로크, 몽테스키외와 토크빌, 그리고 칸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사람들의 이론을 다루기보다는 이 사람들의 철학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과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글이다. 정치 철학은 그냥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언어 유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이익집단에 휘둘리는 얄팍한 포퓰리즘 정치를 ‘생활정치’로 포장하는 오늘날 정치세태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고, 국내외 석학들과 정치 철학과 사상을 공개적으로 논하고 공부했던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