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정치 철학의 핵심은 ‘주권론’에 있다. 왕권과 신권, 시민권의 다툼 과정에서 근대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그 시작은 봉건제를 박살내고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는 왕권신수설에서 시작한다.
(지방자치제도와 연방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에서는 봉건제가 나오고, 미국에서는 개척시대에 치안과 교육 등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카운티가 나온다. 유럽이나 미국은 그냥 자연스럽게 삶의 형태로 자치를 했지만, 주로 중앙집권체제에서 살았던 우리나라는 그런 역사가 없다. 여전히 지방자치가 힘든 이유다. 제도만 도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문화가 되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야 제도가 정착한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체제, 프랑스혁명을 불러오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1638~1715)가 파리 외곽에 있는 베르사유에 궁전을 지어 귀족들을 불러모아 직접 통제하면서 절대 왕권을 확립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당연히 왕권을 치켜세우는 철학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왕권신수설’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군주제의 핵심은 토지소유권과 징세권, 국방이다. 이 모든 걸 왕이 독점하게 된다. 봉건 영주는 모두 몰락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프랑스의 CANAL TV가 제작한 사극 드라마 <베르사이유>를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루이 14세는 무려 72년을 집권한다. 절대 군주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왕권이 흔들리고 정변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 왕의 단명에서 시작된다. 후계자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반면 한 사람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면 왕권이 안정되면서 루이 14세처럼 절대 왕권 체제를 수립할 수도 있게 된다. 이건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루이 14세와 비슷한 인물이 바로 Story가 History 행세하는 타락한 시대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언급된 한무제(B.C 156~B.C 87)다.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린 한무제는 태자로 15년, 황제로 54년을 재위했다. 합이 69년으로 루이 14세와 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장기 집권자는 사후에 평이 안좋다. 루이 14세는 신권과 시민권과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는 절대왕권을 수립하여 결국 프랑스혁명을 불러온 근본 원인을 만든 책임이 있고, 한무제는 궁형의 치욕을 견딘 사마천이 남긴 <사기> 덕분에 폭군으로 기록되고, 한나라를 궁핍하게 만든 황제로 묘사된다.(한무제는 말년에 사마천이 자기를 별로 안좋게 기록한 걸 읽고나서 궁형 내린 거 미안하다며 허허 웃으면서 넘어갔다.)
그로부터 1500년 후인 1432년 조선의 세종은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한무제에 대해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기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오늘날 독재자들도 장기 집권을 통해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내 역사만 보자. 이탈리아 무솔리니 23년, 독일 히틀러 12년, 소련 스탈린 30년, 중공 마오쩌뚱 40년,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24년, 북한 김일성 46년(이후 김정일과 김정은 28년), 쿠바 카스트로 52년, 그리고 당대에 살아있는 독재자로는 푸틴이 23년째 집권하고 있다.
독재자들의 끝은 예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 루이 16세가 삼부회와 타협하지 못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건 순전히 루이 14세가 남긴 절대왕정이라는 유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인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왕권신수설은 영국 제임스 1세가 만들어
오늘날 영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9세기의 알프레드 대왕(849-899)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서 마키아벨리 편에서 잠깐 등장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프랑스어를 표준어로 정비한 것처럼 알프레드 대왕은 잉글랜드라는 정체성과 고대 영어를 표준화한 인물이다, 잉글랜드는 오랫동안 노르만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역시 전편에 등장하는 헨리 8세(1491-1547)가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모든 기본 언어를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꾸는 등 정체성을 확립했다. 넷플릭스에서 <라스트 킹덤> 보면 알프레드 대왕 시대의 영국 역사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역사를 바탕으로 했지만 허구가 가미됐다는 점도 잊지 마시구요.)
알프레드 대왕은 일찍이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에 온갖 내전이나 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약화되는 데 제임스 1세(1566-1622)가 등장하면서 ‘왕권신수설’이 만들어진다. 1603년 독신으로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으면서 튜더 왕조는 대가 끊겼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1세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웨일즈 왕위까지 계승하면서 최초로 대영제국(그레이트 브리튼, Great Britain)을 거느린다. 제임스1세가 주창한 왕권신수설을 완성한 사람이 프랑스의 루이 14세다.
제임스 1세의 전임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 싸우고 성공회를 만들면서 독자 행보를 걸었는데, 어머니 메리 여왕의 영향을 받은 제임스 1세가 카톨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영국은 종교를 이유로 사실상 내전에 들어간다. 카톨릭, 청교도, 성공회가 뒤엉키면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시대가 열렸다.
제임스 1세의 어머니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의 경쟁관계에 대해서는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를 보면 도움이 된다. 영국 왕위를 노리던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대신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던지라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는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창했지만 절대 왕정 체제를 수립하지 못했다. 제임스 1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내전 끝에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에게 패배하여 1649년 목이 잘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은 잠시 공화정 시대로 돌입한다.(이보다 1년 앞선 1648년은 유럽에서도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끝내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해이다. 이 조약으로 오늘날 유럽의 국경선이 대충 정해졌다.)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는 바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극단의 공포가 빚어낸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Thomas Hobbs, 1588-1679)는 찰스 1세 편에 선 왕당파였다. 그런데 1642년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요즘은 청교도혁명 대신에 중립적 표현으로 내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으로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국을 세우자 왕당파 지지자였던 홉스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찰스 1세는 2차 내전을 통해 왕정을 복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1649년에 참수를 당한다.(살벌한 종교전쟁이 벌어지면서 퓨리턴(Puritan)이라 불리우던 청교도인 102명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필라델피아 플리머스로 이주한다. 절반이 죽었다고 한다. 이들이 1636년에 설립한 학교가 바로 보스턴에 있는 세계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는 하버드대학이다.)
홉스는 망명 중에 자신의 철학을 수정한다. 1651년 <리바이어던>를 펴냈다. 동시에 왕정 지지를 철회하고 1653년 크롬웰이 호국경에 취임하자 영국으로 돌아와 크롬웰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데 5년 뒤인 1658년에 크롬웰이 죽고, 1660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보호를 받고 있던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와 왕정을 복구하자 곤란한 처지가 됐다. <리바아어던>을 통해 교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데다 전제군주제 지지도 철회했으니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홉스는 목숨을 건졌다. 찰스 2세가 홉스의 제자였던 것. 찰스 2세는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의 목숨을 살려줬고, 찰스 2세의 보호 덕분에 홉스는 9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홉스는 내전을 겪고 망명을 하면서 현실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단지 삶이 아니라 선한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폐기하고 ‘권리가 선에 우선한다’는 정반대의 관점을 제시한다. 쉽게 말해서 ‘삶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통찰이라고 본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서 먼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관점을 내다버렸지만 이 당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홉스는 무엇보다 안정된 국가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평화를 유지할 절대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군주는 인간의 삶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전제로 군주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사회 계약’을 맺었다는 논리다. 뒤집어 말하면 내 삶을 지켜주지 못하는 군주는 물러나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왕권신수설이 지배하는 절대 왕정 시대에 이 정도의 철학을 내놓은 건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엄청난 불안과 공포를 겪은 경험에서 도출된 논리이지만 말이다.
홉스가 처음으로 제시한 ‘사회 계약론’은 이후에 등장하는 정치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은 사회계약론의 발전과정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전을 겪고 있는 미얀마, 소말리아, 예멘, 시리아 국민들은 홉스의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내전 상태는 삶을 모두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게 독재 정부든 뭐든 받아들이지 않을까?(1990년대 유고 내전을 생각해보면 민주주의 질서를 수립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되고, 독재 체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홉스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현실 속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국방과 안보 공약이 가장 중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절대적 평화가 보장된다면 그 중요성이 낮아지겠지만 말이다. 당장 EU의 독일, 핀란드, 스웨덴, 발트3국, 폴란드를 보자. 평화가 위협받자 국방과 안보가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하물며 북한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는 그 중요성을 말해 무엇하리.(북한은 전범 국가고, 김일성 일가는 전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보편적인 국제법 규범상 그렇다.)
정당성 없는 국가권력은 엎어버릴 수 있다는 존 로크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홉스보다 한 발 더 나간다. 로크도 홉스의 <리바이던>에 영향을 받아 전제군주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찰스 2세가 죽은 뒤에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찰스 2세는 홉스를 보호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신중하면서도 의회와 타협했다. 대외 전쟁은 했지만 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인 제임스 2세는 청교도와의 내전으로 올리버 크롬웰에게 목이 잘린 아버지 찰스 1세를 닮았다. 제임스 2세는 의회를 패스하고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카톨릭을 강요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토리당과 휘그당 모두 반발했다. 로크는 원래 홉스 영향을 받아서 토리당이었는데 당시 휘그당의 당수였던 샤프츠베리(Shaftesbury) 백작에 감화를 받아 생각에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홉스의 철학에 벗어나 좀 더 진보적으로 변해갔다. 로크는 샤프츠베리의 측근이 됐다. 이 때 쓴 책이 <관용론>이다.
사실 로크가 샤프츠베리 백작과 친해지는 데는 아버지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로크의 아버지는 올리버 크롬웰 휘하의 장교였다. 찰스 1세 목을 베는 혁명에 가담했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피가 어디 가겠나.
1682년 샤프츠베리 백작이 쿠데타를 준비하다 적발돼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로 피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크도 당연히 의심을 받게 됐고, 몸담고 있던 왕당파의 산실 옥스퍼드대학에서도 비판을 받게 됐다. 로크도 결국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8년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1650-1702)이 메리 2세((1662-1694)와 함께 잉글랜드를 정벌하고 제임스 2세를 축출하는 명예혁명을 성공시키자 영국으로 귀국했다.
쿠데타 연루 의혹을 받고 망명을 갔다가 돌아온 로크 입장에서는 왕권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당연히 제한해야 하고, 그런 경험 속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창한다. 로크 사상의 핵심은 제한된 정부, 자연권, 시민의 자유권과 사유재산권 보장으로 압축된다.
로크의 사상은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훗날 미국 헌법을 만들 때 로크의 관용론과 정치 철학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군주도 법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많은 왕정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훗날 프랑스 혁명이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로 이어지면서 많은 왕정 국가들은 의회와 타협하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 궁극적으로는 로크가 죽은지 10년 후에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가 즉위하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본격화된다.
로크의 <관용론>은 1689년에 출판한 <관용에 관한 편지, A Letter concerning Tolleration>에 담겨 있는데 비록 무신론을 인정하지 않는 한계는 있었지만 종교 간의 관용을 호소하고 있다.
로크의 철학은 미국 헌법에 담겼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1791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은 오히려 반동적이다. 로베스 피에르의 자코뱅당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숙청한 것 뿐만 아니라 혁명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카톨릭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칙을 스스로 배반했다. 프랑스 민중이 5년 만에 자코뱅당을 단두대 위에 올려 처단한 것이야말로 혁명의 반동 세력을 처단한 진보의 역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80%가 동의해서 성공했던 촛불혁명도 지난 5년간 극소수의 강경 탈레반들이 독점하려 들었고, 그 결과 국민들은 정권 교체로 심판했다. 촛불혁명을 소수의 전유물로 만들려 한 세력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준동했고, 국민들은 또 다시 심판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금도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다수와 소수의 공존, 대화와 타협, 양보와 협상, 존중과 관용을 해치는 반혁명 세력이 민주당 당권을 접수하기 위해 준동하고 있다. 반혁명 세력의 준동을 막아낼 수 있을까? 적어도 자코뱅당이 프랑스를 말아먹을 뻔 했던 그 상황에 비해 훨씬 낫기는 하다. 민주당 내 강경 탈레반들이 민주당을 말아먹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국힘당이 집권 여당으로 버티고 있고, 지방권력도 국힘당이 다수 접수한 상황이라 적어도 대한민국을 말아먹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홉스와 로크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내 개인적인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