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가 승리하면서 제 6공화국이 출범했다. 지금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87체제의 시작이었다. 노태우는 비록 군인 출신이지만 엄연히 민간인 정부였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87체제로 해체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민주정부는 아니었지만 군사독재정권도 아니었다. 과도기 성격을 가진 권위주의 정부였다.
<지나간 글 읽기>
(민주당史)① 1955년 민주당 창당에서 1960년 신민당 분당까지
(민주당史)② 1963년 야권단일화에서 1985년 신민당 창당까지
(민주당史)③ 1987년 통일민주당 분당에서 평화민주당 창당까지
1988년 총선 앞두고 야권통합 추진했으나 결렬
이어 1988년 4월에 제 13대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12대 국회는 원래 1989년 4월 10일에 임기만료였는데, 헌법 부칙에 대선 6개월 후에 총선을 치르는 조항을 넣으면서 1988년 4월에 총선이 치러지게 됐다. 12대 국회의원 임기가 1년 단축된 것이다.
이런 전례가 있기 때문에 노무현은 2007년 1월에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제로 바꾸어 국회의원 임기와 일치시키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대통령 임기는 2008년 2월 25일부터, 제 18대 국회의원은 2008년 6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된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3개월 간격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기가 쉬워진다.
이에 앞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권교체 실패에 따른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야권단일화 압박을 받았다. 1988년 2월에는 양당에서 통합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협상에 나섰다. 기존의 중대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안건도 이슈였는데 평민당에서는 소선거구제를 주장했고, 통민당이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반면 통민당에서는 김대중의 2선 후퇴를 요구했다. 양당 간 타협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3월 8일 민정당에서 소선구제를 단독 통과시켰다.
이제 남은 이슈는 김대중 2선 퇴진이었다. 3월 9일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고, 3월 11일 통민당은 야권 통합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3월 17일 총재직 사퇴를 발표했고, 3월 18일 통민당, 평민당, 한겨레민주당이 통합 추진기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3월 19일 통합기구 회의장에 김대중 지지자 200여 명이 난입해 통민당을 비난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민당은 배후에 평민당이 있다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평민당은 이를 거부했다. 3월 21일 통민당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야권 통합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1988년 총선 첫 여소야대.. 3김 시대 개막
지역주의 구도가 선명해진 가운데 노태우는 대구와 경북, 김영삼은 부산과 경남,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이 격전지가 되었다. 모든 선거구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
당시 지역구별 득표 현황을 보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김영삼의 통민당이었다. 부산에서는 1석을 제외하고 14석을 획득했지만 경남에서는 12대 9로 민정당에게 밀렸다. 수도권에서는 대부분의 후보가 2등으로 낙선했다. 전국적으로 2위로 낙선한 후보는 총 54명이었다. 평민당은 14명이었다. 김영삼의 통민당이 소선구제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셈이다. 통민당이 평민당과 달리 소선거구제를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통민당은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1등을 할 수 있는 지역이 가장 협소했다.
실제로 통민당은 광주, 전남, 전북, 충북, 대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당선자를 배출했다. 반면 평민당은 호남을 제외하고는 서울 17석, 경기 1석에 그쳐서 지역당의 한계를 안게 됐다.
전국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김영삼의 통민당은 수도권에서도 평민당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지만 의석수에서는 크게 졌다. 특히 전국구 배분에서도 통민당은 크게 손해를 입었는데, 이는 지역구 의석수를 기준으로 전국구 의석을 배분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 득표율은 민정당 34.0%, 통민당 23.8%, 평민당 19.3%, 공화당 15.8%였다. 반면 의석수 비율은 민정당 41.80%, 통민당 19.73%, 평민당 23.41%, 공화당 11.70%였다. 김영삼이 손해 본 비율만큼 김대중이 이익을 가져간 결과로 나타났다. 지역주의 구도라고는 하지만 김영삼은 사실 부산을 제외하고는 확고한 지역 기반도 없었다. 경남에서도 민정당에게 열세였다.
1987년 대선과 이어진 1988년 총선 결과는 김영삼으로 하여금 김대중과 영원히 멀어지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은 확실한 지역 기반이 없는 것으로 증명됐고, 지역구에서도 득표율에 비해 큰 손해를 입었다. 더구나 전국구 배분에서도 득표율보다 적은 의석을 배분받았으니 김대중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는 구도였고, 이를 돌파할 새로운 구도가 필요했다. 이 모든 요인이 김영삼으로 하여금 3당 합당으로 이끌었다.
1988년 총선에서 만들어진 ‘여소야대’는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제헌국회 이래로 단 한번도 여소야대는 없었다. 사상 초유의 국면이 펼쳐졌다. 특히 노태우의 민정당은 수도권에서는 김종필의 공화당 때문에 보수 표가 분산돼 큰 손해를 입었다. 노태우에게도 새로운 정치 구도가 필요했다. 여기에 김종필은 충남이라는 기반이 있었지만 영원한 소수를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내각제’가 돌파구였다.
이렇듯 1988년 총선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에게 새로운 정치 구도의 필요성을 보여준 선거였다. 그 돌파구가 바로 3당 합당이었다.
1990년 3당 합당과 1991년 통합민주당 출범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통민당, 공화당이 합쳐서 민자당을 창당하는 3당 합당 선언이 나온다. 의석수는 216석으로 개헌선인 ⅔를 넘어서게 됐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는 1990년 2월 27일 교섭단체 연설에서 “반민주적 정치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먼저 합당을 제안했고, 김대중은 이를 거절했다. 역사의 대의를 위한 결정이었다.
김영삼의 통민당에서는 이기택(부산 해운대구), 김정길(부산 영도구), 김광일(부산 중구), 노무현(부산 동구), 장석화(영등포갑) 등이 합당에 반대하고 이탈했다. 김영삼 본진인 부산에서 이탈자가 4명이나 나온 것이다. 여기에 무소속 박찬종(서울 서초갑)과 이철(서울 성북갑)도 합류했다. 또 1987 대선 당시 양김 단일화를 강력하게 촉구했던 입장에서 통민당과 평민당 어느 정당에도 합류하지 않았던 홍사덕, 장기욱, 조순형 전 의원도 합류해 2월 27일 민주당(보통 ‘꼬마민주당’이라고 부른다)을 창당했다.
이 시대는 정말 많은 정치인들에게 고난과 고뇌의 시대였다. 1987년 통일민주당에서 평화민주당이 분당해서 나가고,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 단일화를 놓고 선택을 강요받고, 다시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으로 들어가면서 꼬마민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은 좌절을 반복했다.
3당 합당 전인 1989년 12월에 4당은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는데 3당 합당 이후 백지화됐다. 이에 김대중은 1990년 10월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여 1991년 상반기 중에 지방의회 선거를 치르고, 그 1년 뒤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광역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단식투쟁 직후에는 전남 영광-함평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김대중은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남 출신인 이수인 교수(이수성 전 국무총리 동생)를 공천했다. 평민당이 호남당으로 전락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거대 여당이 출연하면서 야권에서도 통합이 필요해졌다. 1991년 4월 9일에 평민당은 재야파를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창당했다. 이 때 이우정 교수, 유현석 변호사, 변형윤 교수 등 재야파 5천명이 한꺼번에 입당했다. 이 당시 신민당 7대 강령은 아래와 같다.
(1) 참여민주주의
(2) 도덕정치구현
(3) 정의로운 시장경제
(4) 인권 및 생명존중의 사회문화와 교육입국
(5) 차별없는 국민화합
(6) 공화국연합제 추진
(7) 전방위 자주외교와 도덕적 선진국 건설
도덕성 따위는 내다버린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얼마나 타락한 정당인지 알 수 있다. 한국 정치의 발전은 부패를 척결하고, 도덕성을 강화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주로 야당이었던 민주당 계열 정당과 정치인들은 주류 기득권을 향해 끊임없이 도덕성 강화를 요구해 관철시켰고, 부도덕과 싸웠다. 이제 주류의 위치에 오른 민주당이 그 도덕성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자 ‘도덕성 따위’ 운운하며 스스로 이명박과 같은 수준이 되겠다고 큰소리까지 치는 수준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 당시 강령에는 ‘참여민주주의’라는 개념도 등장한다. 노무현이 이 개념을 계승해 ‘참여정부’를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역사는 세대와 세대의 이어달리기인 동시에 세월의 퇴적층이기도 하다. 부끄러운 과거, 자랑스러운 과거 모두가 쌓여서 오늘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스스로를 못나게 여기는 자학의 역사관도, 스스로 과대평가하여 우쭐거리는 역사관도 모두 컴플렉스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평민당과 재야파가 합쳐서 신민당이 창당된 직후에 민자당은 ‘경찰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이 바로 내무부 산하의 치안본부를 해체하고 경찰청을 신설하는 법안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경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상징하는 경찰청립이 민자당이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한 경찰법으로 탄생했으니 말이다.
1991년 3월에 기초의원선거, 6월에 광역의원선거를 치렀는데 신민당은 패배했고, 꼬마민주당은 참패했다. 그 결과 7월에 양당 통합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재야의 이부영, 장을병 등이 논의에 합류했다. 3당 합당이 불러온 충격과 공포는 소위 범민주진보개혁 세력을 하나의 당으로 불러 모았다. 이 때 처음으로 성격이 다른 민주세력, 진보세력, 개혁세력이 하나의 당으로 합쳤다.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이 끊임없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게 된 것도 정치 철학이 상이한 집단이 오직 ‘반 보수정당'이라는 안티테제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2017년 촛불혁명으로 압도적 다수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5년 만에 몰락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떻든 1991년 9월 법적으로는 김대중 총재 단독대표, 정치적으로는 김대중과 이기택 공동대표 체제로 양당이 동일한 숫자의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절충안을 도출했다. 그리고 신민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출범한다. 합당 당시 의원수는 신민당 67명, 민주당 7명이었다. 다만 민주당에서는 박찬종, 김광일 등이 합류를 거부해서 이탈했다. 아래 사진은 통합민주당 당사 입주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대중과 노무현이다.
이 당시 지도부를 보면, 최고위원에 이우정, 박영록, 박영숙, 허경만(이상 신민당), 조순형, 김현규, 이부영, 목요상(이상 민주당)이 선임되고 사무총장에 김원기, 원내총무에 김정길, 정책위의장에 유준상, 대변인에 노무현이었다.
참고 삼아 통합민주당 9대 강령을 소개한다.
1. 참여 민주주의와 도덕정치 구현
2. 기본권 침해 배격 인간존엄성 수호
3. 민족자존 국익우선 자주외교 추진
4.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추진
5. 자유경제체제, 정의로운 경제확립
6. 차별, 불균형 해소 민주사회건설
7. 교육자율, 민족문화 창달
8. 안정된 주거, 깨끗한 복지사회 구현
9. 기술자립 통해 과학기술 입국 실현
어떤가? 전편에 소개한 1987년 평화민주당 강령, 이 글 앞부분에 있는 1990년 신민당 강령, 그리고 1991년 통합민주당 강령이 발전하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도 기본 골격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다.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근본도 없는 기본소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철학 없는 정당, 근본 없는 포퓰리즘 정당으로 전락했다.
야권 통합에도 1992년 총선-대선 모두 패배
1992년 4월에는 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열렸다. 정주영이 1992년 1월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제 3당으로 등장했고, 통합민주당에 참여하지 않은 박찬종은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으로 부산-경남의 민주개혁 세력이 분열되었고, 호남 고립이라는 지역주의는 강화됐다. 민주당은 한반도를 기준으로 동쪽에서 한 석도 이기지 못했다. 특히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남았던 노무현과 김정길도 모두 낙선했다.
그 결과 지역구에서는 민자당 116석, 통합민주당 75석, 국민당 24석, 신정당 1석, 무소속 21석이었다. 전국구를 합쳐 민자당 149석, 민주당 97석, 국민당 31석을 차지했다. 특히 국민당은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전국정당의 모습을 갖추기도 했다. 통일국민당의 김동길은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한 소위 ‘초원복국집’ 사건을 폭로했다. 지역주의를 폭로한 이 사건은 오히려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민자당은 216석의 거대 여당에서 다시 과반수에 모자라는 149석의 소수 여당이 되었다. 67석이 날라간 셈이다. 다만 선거 후 무소속 당선자 10명이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159석이 되어 여대야소 정부를 구성하게 됐다. 민주당은 전체 의석의 절반이 호남이었다. 호남당이라는 지역적 한계에 갇히게 됐다.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 영남의 민주개혁세력이 통합했지만 외연이 확장되지 않고 오히려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영남 정치인들이 호남당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어 5월 19일에는 민주자유당, 25일에는 통합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잇따라 열렸고, 김영삼은 이종찬을 상대로 66.3%의 득표로, 김대중은 이기택을 상대로 60.2%의 득표로 승리하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1992년 12월 18일 제 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그 결과 김영삼이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김대중은 서울에서 8만표 정도 신승하고, 호남에서의 압도적 득표 외에는 모든 지역에서 패배했다. 단기필마로 나선 박찬종은 6.37%나 득표했고, 정주영은 전국에서 고른 지지를 받으며 1997년 이인제의 등장을 예고했다.
1992년 총선이 지역주의 구도 강화를 보여주었다면, 같은 해 대선은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표출됐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아닌 정주영과 박찬종에게 투표한 22.68%의 표심은 그렇게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실제로 1987년과 1992년 대선을 비교해보면 지역주의 구도가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삼의 경우 13대에 비해 총 득표율이 13.93% 올랐지만 노태우의 36.64% 득표율을 온전히 흡수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영남 지역도 마찬가지인데 노태우와 김영삼의 득표율을 단순 합산할 경우 대구, 경북, 경남은 95%, 부산은 90% 득표율이 나와야하지만 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노태우 표는 정주영과 나눠가진 셈이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충분히 넉넉했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는 이미 몰표가 나온터라 더 이상 득표율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 한계는 수도권에서 극복해야 하는데 김영삼보다 저조한 상승률을 기록했다. 수도권조차 김영삼에게 패배한 이상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더구나 선거 막판인 1992년 11월 25일 민주당은 전노협, 전대협, 전교조, 전농 등 재야단체 연합체인 전국연합과 정책연대를 발표했다. 이 연대로 기존의 ‘민주개혁 연합’은 ‘민주진보개혁 연합’으로 확대됐다. 이들의 지지 선언은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어떤지는 모르겠다. 실증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질적인 정치철학을 가진 ‘민주진보개혁 연합’은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선거 결과는 김대중으로 하여금 소위 ‘민주진보개혁 연합의 한계’를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들고 나온 새로운 전략이 바로 ‘지역등권론’이다. 민자당에서 이탈한 김종필과의 연합정권을 통해 충청권을 이탈시키고, 보수 정당 지지표의 일부를 가져온다는 전략이었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 패배한 직후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